창작스토리

악을 행하는 자는 자기가 선을 행한다고 굳게 믿어야 한다.(운명은 숙명이 드리우는 오묘한 그림자(제4회))

허슬똑띠 2023. 1. 28.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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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줄위에 춤추는 무서운 악연의 끝은?

두 번째 악연

 


  돌아오면서 나는 희미하게나마 닥쳐올 불운한 미래의 그림자를 감지했다.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과 용광로와 같이 들끓는 분노가 뒤섞여 갈팡질팡하는 마음은 결국 표현할 수 없는 참담한 심정으로 변하여 합리적인 사고능력을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게 했다. 이렇게 요동치는 정신세계와는 달리 승용차 내 외부 할 것 없이 모든 공간은 마치 진공 속에 붕 떠있는 것처럼 너무나 조용했는데 그와 같은 적막함이 불안감을 증폭시켜 온몸을 달달 떨리게 만들었다.
  악마가 지옥의 불길처럼 너울대는 미래의 환영에 몸서리가 쳐졌다. 진저리를 치면서도 나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돼, 절대로!' 하지만 불안한 예감은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 라은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고 설상가상 며칠 후 나는 국가 기밀자료를 북한으로 빼돌리려 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기관원들은 허무맹랑하게도 집에서 북한 간첩과 접선하여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갖가지 증거물들을 찾아내었다.


  나의 주장은 메아리 없는 공허한 외침에 불과할 뿐이었다. 법 돌아가다 외돌아 가는 세상이라더니 나의 처지가 딱 그 짝이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되어 어느 누구도 제대로 갈피를 잡아주기는 다 틀렸다는 것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지경이 됨에 따라 아예 딸 라은을 찾을 희망의 끈조차 놓치게 되었다는 비탄감은 절망의 블랙홀에 빨려 들게 했다. 걷잡을 수 없는 나락이었다.
  법정에서 증인으로 나서 평소와 같이 선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는 강유영은 되돌릴 수 없는 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인식했는지 잘못된 행동을 정당화하는데다 그의 단순한 욕망을 대입하고자 혈안이 되어있었다. 그에게는 '악을 행하는 자는 자기가 선을 행한다고 굳게 믿어야 한다.'는 말이 꼭 들어맞는 것 같았다. 마치 진실게임의 승자처럼 구는 듯 했다.

  감옥에서 한동안은 무력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마치 세속적인 것과 성스러운 것이 서로 어깃장을 놓아 꾸며놓은 공간인 것처럼 보였다. 나에게 신기루처럼 닥쳐와 있는 하나하나가 생소하기만 했지만 낯익은 일상 같기도 한 건 왜일까? 이런 엉뚱한 의문의 꼬리가 그렇지 않아도 거의 메말라가던 사고의 힘을 잃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사랑하는 아내 소다미가 딸의 실종과 남편의 어이없는 구속에 충격을 받아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였다가 스스로 이기지 못하고 끝내 사망하였다는 소식은 굵은 빗줄기가 사정없이 노드리듯 맥이 빠질 대로 빠진 나의 마음을 내리 후벼 팠다. 죽음보다도 더 한 절망으로 뇌의 기능이 완전히 정지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내 소다미의 친구인 정다은씨가 넣어준 사식을 받는 순간, 그녀가 보살펴주고 있는 어린 아들 유라온에게 생각이 미치자 마치 하얀 화선지위에 여러 가지 색의 물감이 현란하게 스며들듯 백치와 같던 머릿속에 이런저런 추억들이 차곡차곡 돌아오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 엄마가 저 하늘로 떠나고 아빠는 영어의 몸이 되어 자신과 함께 살수 없는 처지가 되자 아들 유라온은 나 이상으로 당혹감에 빠져 한 동안 울음바다를 떠다녔다고 했다. 
  나는 아들에게 계속 용기를 불어넣어 주기 위해 노력했다. '회의로 가득 찬 세상이 지독한 의심으로 너를 공격한다 해도 언제나 너 자신을 믿어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이렇게 나 자신에게 주절거리던 말을 아들에게 반복적으로 들려주었다. 쉽게 이해하리라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나의 말을 이해해서일까? 나는 그렇게 믿었다. 대견하게도 빠른 시일 내에 충격을 이겨낸 것처럼 보였다. 스스로 알아서 집안일이며 학교생활을 꿋꿋하게 해나가는 것이 어린 아이 답지 않다고 정다은씨는 놀라워했다. 

변신의 귀재

  강유영은 그의 아버지 강명규가 항상 못마땅했다. 자신을 보필하여 그가 일궈놓은 재산을 적절히 관리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를 자신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두려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건 아버지의 욕심에 불과했다. 그러니 아버지가 그런 의미로 아들인 자신에게 자랑스럽게 들려주던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은 모험담이 달갑게 들리지가 않았었다. 그날도 자신을 설득하면서 그 이야기를 재탕했다.

  1950년 말, 승승장구하던 국군과 유엔군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중국의용군의 개입으로 계속 후퇴하고 있을 무렵 강명구는 상황을 재빠르게 파악하고 주위 사람들 모르게 가족들과 함께 고향을 떠났다. 한국군과 UN군이 진격해 올라오자 순간적인 변신을 꾀한 그가 UN군에게 빌붙어 공산주의자들에게 자행한 전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전세가 다시 밀린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노심초사하다가 남쪽으로 내려가기로 결심했다. 정신없이 얼마쯤 왔을까? 대공포화로 수놓아진 하늘에서 다소 낮게 나는 비행기가 보였는가 싶더니 대공포를 맞았는지 비행기가 이내 검붉은 연기를 내뿜으며 추락하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러다 파괴된 비행기에서 탈출한 조종사의 낙하산이 그들 방향으로 내려오는 것을 올려다보면서 그의 머리는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쪽으로 내려가서 만날 장소를 약속한 뒤 아내와 두 아이를 먼저 보냈다. 그런 다음 낙하산이 내려오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낙하하는 지점 부근에서 상황을 살피던 그는 지상으로 내려온 미군조종사에게 다가갔다.
  그를 발견한 조종사는 재빨리 권총을 빼어 들고 다가오지 말라는 몸짓을 하면서 그를 위협했다. 다소 거리를 두고 그는 온갖 손짓발짓을 다해가며 자신이 그에게 우호적인 존재라는 것과 그가 피신하는 것을 돕겠다는 뜻을 전했다. 웬만큼 그의 뜻이 전해진 것 같기는 했지만 여전히 미덥지 못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도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을 알고 권총을 도로 집어넣었다.


  어깨부분과 팔 그리고 다리 한 쪽에 부상을 입은 조종사를 부축하고 부랴부랴 남쪽으로 향했지만 중국의용군의 꽹과리와 나팔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기 시작하자 아무래도 추격권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다시 정확히 통하지는 않지만 이들을 피하기 위한 방법을 그에게 설명했다. 그는 마침 공산당원증을 소지하고 있었다.
  먼저 등에 진 봇짐 속에서 옷을 꺼내 그의 옷을 우리 옷으로 갈아입히고 미군복은 파묻었다. 그런 다음 낙엽 속의 시커먼 흙을 파내어 그의 얼굴과 손 등에 발라 그의 용모를 잘 알아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래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하여 깊숙이 파인 나무 사이 홈에 그를 숨긴 다음 마른 나뭇가지와 낙엽 등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쌓아 위장했다.
  그리고 자신도 부상당한 것처럼 절룩거리며 그가 있는 곳에서 벗어났다. 밀려 내려오던 중국의용군에게 잡힌 그는 공산당원증을 내보이면서 설명했다. 자신은 후퇴하는 국군에게 잡혀 있다가 극적으로 탈출하여 해방군이 오기를 기다렸다고. 다행히도 조선인 출신 군인이 있어 쉽게 말이 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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