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스토리

지난날의 난마처럼 얽힌 숙명의 그림자는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운명은 숙명이 드리우는 오묘한 그림자(제16회))

허슬똑띠 2023. 2. 10.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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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줄위에 춤추는 무서운 악연의 끝은?

 

연정(戀情)(계속)

 

"다솜씨! 나를 바라보다 갑자기 꿈꾸는 표정이 되니 당혹스럽네요."

유라온은 그녀를 윤경위라 하지 않고 직접 그녀 이름을 부르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다른 요원들이 있는 장소에서는 깍듯이 '윤경위'라고 불렀다.

"훗훗! 왜 겁나세요? 내가 유선생님을 최면에 빠뜨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알아볼까 봐서요?"

그녀는 유라온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최면술은 아니더라도 이제 겨우 걸음마 단계인 예지력으로나마 유선생님을 안전하게 지켜드릴 테니 염려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러나 다솜의 예지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아직 설익은 능력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라온은 그것에 매우 감탄했다.

"오! 다솜씨는 갖추지 않은 것이 없는 것 같네요. 출중한 미모에 누구도 당해낼 수 없는 무공에다 그리고 매우 뛰어난 머리 하며, 감히 넘보지 못할 대상이라고 주위 분들의 칭찬이 자자하던데요. 부럽네요!"

 

"저는 오히려 유선생님이 부러운데요. 훌륭하신 선친의 뜻을 이어 받아 이렇게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아요?"

"글쎄요? 그렇지만 나에게도 어두운 추억이랄까 뭐랄까 그런 게 있어요.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심연에 잠긴… 아주 어릴 적의 슬픔인지 그저 환상에 지나지 않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항상 깊이 잠겨있어 잘 떠오르지 않아요."

다솜은 이 말에 다시 또 묘한 느낌이 몰려왔다. 왜냐하면 순간 명확하지 않은 계집아이와 사내아이의 모습이 아주 밝은 빛에 쌓여 환영처럼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유라온이라는 사람이 간직하고 있다는 어두운 기억이 내가 보았던 그들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다솜은 혼자 중얼거리면서도 별로 자신이 없었다.

 

악연의 시작 (첫 번째 악연)

 

아직은 긴박한 상황이 전개되기 얼마 전, 윤경위는 정보파일을 조사하다가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유라온의 아버지 유강성이 보안법위반으로 오랜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형이 끝나기 전에 옥에서 사망했는데 이를 제보한 사람은 바로 연구원 동료였던 강유영이었다. 그런데 강유영은 유강성이 투옥 된지 2년 후쯤 미국으로 이민 가버렸다. 물론 그의 아버지 강명규가 사망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으나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윤경위는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어 갈려다가 그녀를 사로잡는 미지의 힘에 이끌려 이들의 관계에 대해 더 추적해보기로 했다.

 

유강성의 선친인 유진의 고향은 황해도였는데 그가 해방 전 부친의 장례식에 간 이후로 그의 행적은 끝났다. 유진이 돌아오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조사해보았지만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같은 연구소에서 근무했으면서 유강성을 고발했던 강유영의 선친인 강명규로 방향을 틀었다.

그의 원적은 평안남도였는데 계속 조사를 하다 보니 원적 정리할 당시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 지방 출신 사람을 돈을 주고 사서 증인으로 내세워 원적세탁을 한 사실을 밝혀냈다. 좀 이상하다 싶어 더 파고들어 가보니 그의 본래 고향은 유진과 같은 곳이었다. 윤경위는 고개가 저절로 갸우뚱 해졌다. 고향을 바꾼 것은 왜일까? 무슨 일이 일어났었던 것일까? 여기까지 알아냈으나 이것 또한 더 이상의 진전이 없자 그녀는 그냥 허탈해지는 기분을 억누를 수 없었다.

 

유라온도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하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그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며칠 뒤 밤늦은 시간 그가 연구 작업을 마치고 쉬기 위해 나왔을 때 차를 준비해가지고 와서 잠시 그와 함께 앉았다. 그리고 모르는 체 하면서 그에게 혹시 강유영이라는 사람을 아는가 물어보았다. 그는 그 말을 듣고서도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한참 동안 그녀를 빤히 쳐다보더니 자신은 지난날의 난마처럼 얽힌 숙명의 그림자는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강명규의 본명은 강은규이었다는 것, 강명규는 그의 형이었는데 어느 날인가 홀연히 사라져 생사불명이었다는 것 그리고 강은규가 자신의 허물을 감추기 위해 자기 형 행세를 했을 거라는 말을 하고 나서 그가 아버지의 임종직전 들었던 그의 할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1948년 가을 어느 날, 검은 비단처럼 드리워진 밤의 적막함을 가정집에서 흘러나오는 불빛들이 드문드문 수놓고 있는 가운데 훤칠한 키의 사내가 휘적휘적 골목길을 들어서고 있었다. 유난히 흰 얼굴은 서늘한 어둠 속에서도 그의 단정한 이목구비를 확연히 가늠케 했다. 그가 어떤 한옥 집에 거의 도착했을 때 누군가가 '유진씨'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집안 친척임을 확인한 순간 유진은 반가움에 앞서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나 그는 감정을 숨기고 반갑게 인사했다.

“아니 예까지 어인 일이세요?”

“자네 부친이 어제 돌아가셨다네.”

그는 덤덤하게 아버지의 타계 소식을 전했다.

“그동안 속을 많이 썩여드려 이제는 못다 한 효도를 제대로 하겠다고 하면서도 직장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뵙지 못했는데…”

예감이 적중하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그는 통한의 후회가 밀려드는지 말끝을 흐렸다. 어느새 그의 눈에는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유진은 어릴 적에 부친의 만류를 뿌리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갔었는데 넉넉하지 못한 집안 사정으로 혼자 돈 벌며 고학해야만 했다. 그러느라 지쳐있는 데다 병까지 얻게 되어 학업을 계속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나마 겨우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곧바로 귀국한 뒤 병 치료를 하느라 1년간을 고향에서 지냈다.

휴양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취직자리를 물색하다가 요행히 서울에 있는 한국상업은행에 합격하여 지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지금의 아내와는 3년 전 결혼해서 두 아이를 낳았는데 큰 아들이 한 살도 못되어 병사했다.

그는 가까운 곳에 사는 은행 동료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그와 함께 고향인 황해도 연백군으로 향했다. 아들 유강성은 이제 겨우 한 살도 채 안되었으므로 아내는 애와 함께 집에 남아있도록 하였다.

 

38선이라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남북을 갈라놓고는 있었지만 아직 조심스럽게 왕래가 가능한 때였다. 이제껏 자연스레 오가던 길이 해방이 되면서 도리어 통행이 부자연스러워지자 가까운 거리였지만 그는 고향을 자주 찾지 못했었다. 그의 친척과 무사히 고향이 도착했지만 유진은 마을 전체의 분위기가 음울하게 느껴졌다. 더군다나 그의 아내 서난희의 집안은 가끔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 피폐되어 있었고 처가집안 식구들의 표정도 매우 어두워 보여 그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처가식구와 친척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장례식을 치를 수 있었다. 그러나 장례식이 끝나기 무섭게 내무서원들이 들이닥쳐 그를 끌고 가 버렸다. 친척들이 그들에게 항의해보았지만 막무가내였고 길을 막자 총구를 들이대었다. 그 와중에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바로 이웃에 살던 강은규가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을 보았다.

 

유진과 강은규의 집안은 한동네이기도 하였지만 바로 이웃이었기 때문에 사이가 참 좋았다. 강은규 또한 유진과 비슷한 나이 또래였기 때문에 잘 어울려 지냈다. 그러다 유진이 유학생활을 하게 되면서 상당 기간 동안 보지 못하게 되었는데 그 동안 강은규는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집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문제는 결혼시기가 다가오면서 촉발되었다. 유진이 서울의 은행에 취직하고 나서 혼담이 오고 갔는데 그 대상이 유진의 아내집안이었다. 그 집안은 그 동네에서 갑부로 소문났었는데 막내딸 사윗감을 고르다가, 집안은 그리 풍족하지 않지만 유학 가서 공부도 제법 했고 번듯하게 은행에 취직한 유진을 맘에 들어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강은규는 안절부절 했다. 그가 오랜 동안 혼자 점찍어왔고 꼭 결혼 하리라 다짐하고 다짐했던 색시가 아니던가? 그런데 망할 놈의 세상이었다. 하필이면 그와 친하게 지냈던 유진이라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도 짝사랑이었다는 게 아무 짝에 소용없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색시 집안에서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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