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스토리

그러나 나는 '업은 창조되는 것이다.' 라고 생각을 바꿔버렸어요. (운명은 숙명이 드리우는 오묘한 그림자(제17회))

허슬똑띠 2023. 2. 11. 0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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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줄위에 춤추는 무서운 악연의 끝은?

 

악연의 시작 (첫 번째 악연)(계속)

 

유진의 혼례식 날 주변에는 얼씬도 하지 않고 냇가에 앉아 풀잎을 뜯어 물에 떠내려보면서 울분을 씻어 낸 그는 흠모했던 마음을 다 털어내기로 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그동안 거절해왔던, 오가던 혼담을 받아들여 그도 얼마 뒤에 결혼했다.

그러나 유진이 오랜 만에 고향에 돌아오자 잊고 있었던 옛 생각이 그에게 사악한 마음을 불어넣었던 것일까? 자신도 모르게 그를 미군 첩자라 밀고해버렸다. 내무서에서 돌아오는 동안 내내 그는 온몸이 떨리는 것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실수도 엄청난 실수였다. 그러나 되돌릴 수는 없었다.

내무서로 잡혀들어 간 후 얼마간은 그를 찾아갔던 친척과 처갓집 사람들로부터 간간히 소식이 들렸으나 한 순간 끊어져 버렸다. 그런 후 유진의 행방과 생사에 대해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서울에서 곧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유진의 아내는 예상외로 기간이 길어지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그녀에게 날아온 소식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이 소식을 접하고 남편을 찾아 고향으로 가고자 했으나 주변 사람들의 만류로 포기하고 말았다. 38선의 출입통제가 한층 강화되어 아녀자가 갓난아이와 간다는 것이 너무 무모하였던 때문이었다.

고향에 가서 남편을 찾는다는 것도, 또한 되돌아온다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으므로 포기는 했지만 언젠가는 틀림없이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정화수 한 그릇 떠 받쳐 놓고 그 앞에서 빌고 또 빌었다. 후에 그녀는 남편이 돌아올 수 없었던 이유가 고향 사람인 강은규의 모함인 것을 알게 되었지만 어찌할 수 없었다. 더구나 그는 그의 형 이름인 강명규로 이름까지 개명하였으니 더더욱 그러했다.

 

처음 그가 아버지의 임종 직전,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운명에게 가해진 혹독한 시련과 그 원인에 대해 들었을 때는 살이 떨리도록 그들을 죽이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머니가 저 세상으로 떠나게 된 간접적인 원인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아버지도 그 이야기를 처음 할머니에게 들었을 때 그와 비슷한 심정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 유강성이 복수불수(覆水不收)인데 그 생각에 집착하면 무엇 하냐면서 더 이상 마음에 담아두지 않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고 그도 그저 운명이려니 하고 잊기로 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강유영이라는 사람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무슨 연유인지 모르지마는 가족 모두를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 갔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모든 악연이 끝났다고 단정해버렸기 때문에 새삼 그런 사실들을 되새길 필요가 없다는 투였다. 그러면서 이와 관련하여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에 대해 말했다.

"업은 우리가 흔히 업보라는 말로 표현 하듯 인과응보의 법칙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나는 '업은 창조되는 것이다.' 라고 생각을 바꿔버렸어요.

업은 과거라는 것에 우리를 붙들어 매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라는 것에 변화를 주고자 하는 창조적인 힘도 있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현세에 있어 사소한 흐름의 변화라 하더라도 서로의 관계에 큰 작용을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이것이 내세에 주어질 업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나는 그 창조의 힘을 믿기로 했습니다."

 

이와 함께 라온은 자기를 위로해주려는 그녀의 마음에 고맙다는 말도 덧붙였다. 윤경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따뜻한 미소로 그의 인사에 답하기는 했으나 그의 이 말이 깊은 여운을 남기며 오랜 동안 기억 속에 남아있었다.

이후 단우공에게 이러한 사실을 얘기하자 유라온의 생각이 대견하다는 듯 온화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래도 그녀에게는 만일 그 역시 할아버지나 아버지와 같은 업을 짊어졌다면 유라온의 말 그대로 정말 창조적인 변화를 맞이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은 계속 맴돌았다.

 

암약의 시작

 

유라온이 인공석유를 대량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였다는 정보가 암암리에 여러 정보기관 및 오일메이저 등에 알려지게 되면서 향후의 석유시장 동향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개발된 기술의 실용화 여부를 예의 주시하게 되었다. 특히 화석연료의 중심 생산국과 이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오일메이저들은 엄청난 파장을 예상하고 그 대응책 마련에 부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 밖에도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베일 속에서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거대 조직들 역시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아직 이러한 내용이 공식적으로 발표된 바는 없었기 때문에 외견적으로는 석유 값의 상승에 대한 우려의 기사가 넘쳐나고 있었고 환경단체의 화석연료 사용억제를 촉구하는 성명과 시위도 계속되고 있었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날이 어두워지면서 형형색색의 수많은 불빛들이 뉴욕이라는 도시를 아름답게 치장하고 있었으나 교통체증으로 인한 시끄러운 자동차 경음기 소리와 매연이 그것을 망가뜨리고 있었다. 그래도 보도를 가득 메우며 오가는 사람들은 이에 전혀 개의치 않고 일상적인 불협화음의 하모니 정도로 여기는 듯했다. 또한 뉴욕이라는 도시가 차량통행위주가 아닌 보행자위주의 교통정책 때문에 지하보도나 육교와 같은 보행자에게 불편을 주는 시설은 거의 없다는 사실 역시 보행자들에게 차도에서의 혼잡함을 잊게 하는 건지도 몰랐다.

 

번잡한 도로를 빠져 나온 택시 한 대가 다소 한적한 길가에 멈추어 서자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내렸다. 그다지 크기 않은 키에 단단하고 날렵한 체구의 사나이는 흑갈색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겼고 깨끗이 면도를 해서 인상이 꽤 깔끔하게 보여 일반 사람은 높은 연봉을 받는 금융전문가로 인식하기 십상이었다. 또렷한 이목구비에다 갸름한 턱은 얼핏 보면 잘생긴 30대 중년의 남성으로 보였으나, 다소 날카롭게 보이는 콧날이 그의 성격이 매우 예민하다는 것을 대변해 주는 듯 했다.

 

백인이기는 하였으나 동양계의 피가 섞인 것처럼 보이는 그는 주위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듯 태연한 걸음걸이로 나아가다가 다소 고색창연하게 보이는 건물이 나타나자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의 소음이 사라지고 정적이 몰려오자 이를 의식하듯 발소리를 죽이며 조심스럽게 나무계단을 올라갔다.

이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가며 그는 며칠 전 노트북으로 수신한 파일의 내용을 더듬어 보았다. 한 동양인 인물 사진과 함께 그와 관련된 사항들이 적혀 있었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임무에 대한 설명과 지불할 금액 등이 나열되어 있었다. 모든 것을 기억 속에 꼼꼼히 메모리 한 다음 그 파일을 완전히 삭제해 버리고 나서 생각해보니 일의 대가에 비해서 의외로 손쉬워 보여 마음에 걸렸었다.

 

'이거 나답지 않군. 아니야! 올드버쳐께서 항상 말씀하셨더랬잖아! 일의 집중도는 곰보다 토끼 사냥할 때 더 필요하다고 말이야. 요번 일이 바로 그거야.'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그의 노트북을 통해 비밀계좌를 살펴보았었다. 착수금 입금을 확인한 후 그만의 비밀거래처에 필요한 물건 준비를 하도록 요청했었고 오늘 제 삼의 장소에 배달된 것을 찾으러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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