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스토리

얼굴에는 고통이 머물다가 간 흔적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의문스럽게도 평온함이 서려있었다. (운명은 숙명이 드리우는 오묘한 그림자(제23회))

허슬똑띠 2023. 2. 19. 0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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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줄위에 춤추는 무서운 악연의 끝은?

 

마지막 악연 (死의 찬가) (계속)

 

그의 파견이 결정되기 바로 전 날 저녁 그를 호출한 세르게이가 그가 한국으로 파견될 것임을 알려주었을 때는 설마했었다. 그러면서 또 다시 모종의 지시를 내렸다. 언젠가 대학생시절 그가 위기 상황에 몰렸을 때 그로부터 구원을 받은 후 이것이 자신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그대로 적중했다. 그가 국제범죄수사대에 근무하게 된 후부터 그는 수시로 여러 가지 정보를 요구해왔었던 것이다. 그가 세세하게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비보이와 관련된 모든 정보 역시 세르게이가 속한 그림자 조직으로부터 나온 것임이 분명했다. 그만큼 그들의 정보수집 능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던 것이다.

 

세르게이는 세 가지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하나는 정보를 감쪽같이 숨기는 데 이용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중 하나는 가로 세로 5cm크기의 사각형 금속형태였는데 상당히 얇은 판이었다. 전도체 플라스틱 재질로 만들어졌으며 겉에는 아주 강한 산성 물질에도 견딜 수 있는 물질로 코팅되어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나머지는 투명액체를 담은 비닐 봉투와 연결코드였는데 이것을 건네주면서 사용방법을 설명해주었다.

'입수한 자료를 연결코드를 이용하여 판으로 완전히 이동시킨 다음 그 판을 액체에 담그면 자동적으로 아주 작은 알갱이로 분해된다. 그것을 그대로 마시면 알갱이들이 위벽에 철석같이 달라붙어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다. 이것을 복원시키는 것은 당신이 그 상태로 오면 여기서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집어 든 그는 그것을 단숨에 들이마셨다. 하나도 남김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손수건으로 입을 닦으며 컴퓨터에 폭파장치를 설치했다. 신속하게 집안을 빠져 나오는 도중 그림자 인물에게 성공했다는 전화를 했다.

 

미국을 출발하기 전 만났던 세르게이와 헤어지고 나서 집으로 돌아와 그가 전해준 물건을 살펴보다가 한쪽 편에 희미한 문양을 발견했다. 세르게이는 그 때까지 한번도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 문양이 낯설지 않음을 느끼고 곰곰 기억을 더듬어 보다가 그만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것은 그의 부친이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바로 그날 연구실에 버려져 있었던 쪽지에 그려진 바로 그 문양이었다. '세르게이가 그 조직원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이놈들은 아버지를 죽인 원흉이자 원수가 아닌가?'

머리에 총 한방 맞은 듯 잠시 멍했다가 감정이 억누를 수 없을 정도의 분노가 솟구쳐 치를 떨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세르게이인가 싶어 욕을 해대며 전화기를 들어 확인해보니 그의 전화는 아니었다. 불안한 느낌으로 입구 쪽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받아보니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태껏 당신 아버지를 해친 원수로부터 조정 당해왔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잘 알겠지요?'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날카로움이 배어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제임스는 놀라면서도 그가 전화 반대편에서 의미 있는 웃음을 띠고 있는 모습이 그려졌는데 계속해서 서랍을 보라고 했다. 거기에는 겉에 해독약품이라는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세르게이로부터 받은 것은 위 속에 부착시키는 것이고 지금 것은 그것을 몸에서 빼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성공적으로 기술정보를 빼돌려 원상 복구한 다음 자기에게 전달해준다면 천만 달러를 제공할 것이며 이를 승낙한다면 조금 후 사전 착수금으로 삼백만 달러를 그의 계좌에 이체할 것이라고 했다. 느낌에 그가 제3국의 사주를 받는 인물인 것 같았다. 제임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의 제안을 승낙했었다.

 

이제는 태연히 돌아가서 본국 수사대에 상황보고를 하고 후속지시를 받아 그에 따라 행동하면 될 것이었다. 수사대 본부에서는 요원 두 사람이 사망하고 비보이의 행방도 다시 묘연해진 상황이라 철수를 명령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서 기술개발자료를 원상 복구하여 넘겨주고 잔금을 송금 받는 일만 남은 것이다. 그 후에는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날아가면 될 것이었다.

 

서글픈 인연

 

무작정 텔레파시가 이끄는 대로 달리던 윤경위는 잔상에 남아있던 곳과 일치하는 강변길에 도달했다. 계속 강변을 따라 가다 보니 환영과도 같이 숲 속으로 난 길 입구가 나타났다. 얼마 후 그녀는 숲 속에 다소곳이 자리 잡은 집을 발견하고는 차를 세웠다. 밖에서 살펴보니 외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집 근처로 접근한 윤경위는 권총을 꺼내 들고 창문을 통해 내부를 살펴보다가 누군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내부의 상황으로 보아 예상했던 불행한 사태가 이미 일어난 것 같았다.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문을 열고 들어가 인기척이 나는지 다시 점검하다 보니 거실 바닥에 두 명의 건장한 사나이 주검이 뒹굴고 있었다. 방과 주방을 조사하였으나 그 외에 사람은 없는 것으로 보였는데 반쯤 열린 지하실 문틈으로 매캐한 냄새가 풍겨왔다.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며 내려온 그녀는 망연자실했다. 완전히 파괴된 컴퓨터 장비가 있는 옆 구석에 옷이 온통 핏빛으로 물들어 있는 유라온이 쓰러져 있고 바닥에는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고통이 머물다가 간 흔적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의문스럽게도 평온함이 서려있었다.

 

윤경위는 침통하게 무릎을 꿇고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다가 그의 손을 잡고 들어 올리는 순간 그녀의 먼 기억 속에서 자주 나타났었던 사내아이와 계집아이의 모습이 또렷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사내아이의 얼굴이 유라온의 얼굴 위에 겹쳐지더니 싱끗 미소를 띠었다.

망연자실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녀는 손을 잡은 채 덥석 그의 시신을 부둥켜 안았다. 뜨거운 눈물이 쏟아지면서 울음이 복받쳐 올라왔다.

유라온은 다름 아닌 그녀의 친 오빠였던 것이다.

 

다솜의 엄마인 윤경은은 그녀에게 입양 등에 대해서는 전혀 입도 뻥긋하지 하지 않았었고 그녀 할머니 역시 진실을 감추고 있었다. 그래서 다솜은 내내 윤경은을 친엄마로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아주 어린 나이에 입양되었던 탓으로 그 당시의 기억은 뇌리 속에서 깊숙이 잠자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계속되는 가위눌리는 꿈으로 인한 고통은 일종의 병이려니 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수차례에 걸친 과거로의 퇴행결과에서 나타난 이미지들은, 유라온을 보는 순간부터 그녀의 내면 깊숙이 침전되어 있었으나 그녀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과거의 어두운 경험과 그와의 관계에 대한 의문을 계속 상기시켜왔던 것인데 지금에서야 억눌렸던 애정의 감정 폭발과 라온의 신체 접촉을 통해 완전하게 발현되었던 것이다. 그 후 다솜의 얘기를 들은 어머니 윤경은은 지난날을 얘기해주었다. 얘기를 듣고 난 다솜은 유라온이 그녀의 오빠였음을 느낀 것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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