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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스토리

로즈파피(Rosepoppy) 다시보기(4회~6회)

by 허슬똑띠 2022.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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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베이(Rosebay)와 양귀비(Poppy)의 특성을 가진 여인의 이야기

 

마고도가 제가람을 만나고 돌아오자 이든 경위와 오장석 경사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동안의 수사상황을 보고하기위해서이다.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실시한 수색작업에서 저격 장소에 대한 단서를 전혀 잡지 못했다. 이후 마고도는 두 사람에게 보다 세밀한 재조사를 지시했었다. 그들은 사옥 현관 앞쪽에 표시해둔 남회장의 피격 위치로부터 저격수가 위치했었을만한 곳을 가늠해보았다. 그룹사옥 현관을 바라볼 수 있는 빌딩을 차례차례 짚어보다가 아주 적절해 보이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 수색 당시 당연히 조사했었을 것이나 꼼꼼하게 다시 살펴보기로 했다. 확인해본 결과 공사 막바지에 있는 신축건물이었는데 공시업체가 부도가 나서 공사가 마무리되지 못한 채 장기간 방치되어있다고 했다. 에오스 사옥현관을 약간 비스듬하게 내려다보는 위치였고 거리는 400여 미터 정도 떨어진 것으로 관측되었다. 이 경위가 망원경으로 총이 발사된 높이의 지점을 추측해본 뒤 곧장 그 건물로 갔다.

건물주변에는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건축자재들이 일부 남아있었다. 그곳에서 에오스사옥을 내려다보며 적당한 저격지점을 찾아보았다. 창틀이 비교적 낮아서 무릎을 꿇고 앉아 조준하면서도 최대한 몸을 가릴 수 있는 최적의 위치로 판단된 곳을 발견했다. 하지만 바닥에는 전에 수사관들이 다녀갔던 발자국들이 이리저리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실망스러웠지만 나름대로 세밀하게 조사해 보았다. 이전의 조사과정에서도 보고된 것과 동일한 결과뿐이었다. 탄피 비슷한 것은커녕 범인이 남겼을 만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범행 실행 장소로 추정되는 곳이 난장판이 되지 않았다고 해도 잘못 짚은 것 같아 실망스럽게 내려왔다. 그대로 건물 밖으로 나오다 이 경위가 일층 계단 옆 공간에 적재되어있는 건축자재를 힐끔 보았다. 그것들 사이에 공사용 섬유펠트의 끝단이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이 경위는 오 경사와 함께 그것을 끄집어내어 살펴보았다. 뒷면에는 저격수가 위치했을 것으로 판단되는 층에 미세하게 깔려있던 먼지가루가 보일 듯 말 듯 묻어있었다. 그 가루를 조금 떼어 해당 층으로 올라가 비교해보니 동일했다. 두 사람은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펠트를 부근에 있던 비닐로 잘 싸맨 다음 차에 싣고 국과수로 가서 지문확인과 기타 참고 될 만한 것들이 있는지 감식 의뢰했다.

이 경위가 자초지종을 설명한 다음 후속 사항에 대한 내용을 덧붙였다.

“어제 결과가 나왔는데 지문은 물론 단서가 될 만한 것은 티끌만한 것도 없다고 합니다. 저격수가 그 펠트를 깔고 앉았을 것이기 때문에 혹시라도 입었던 옷의 실오라기 같은 것 정도 묻어있을 가능성을 기대했었는데 정말 용의주도한 놈입니다. 그래서 혹시나 남회장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작자가 전문킬러를 고용한 건 아닐까하는 생각조차 듭니다. 우리나라에선 그럴 가능은 희박하겠지만 말이죠.”

“수고들 했어요. 범인이라면 그 정도의 사전 사후조치는 마땅히 했을 거라고 봅니다. 추정되는 범행 현장조사에서도 단서를 잡지 못했으니 더 판다고 해서 나올 것은 없으리라 판단되는데... 두 사람 의견은 어떤가요?”

보고가 끝나자 마고도가 그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희들 의견도 같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다음과 같은 사항에 주력하도록 합니다. 먼저 정영길 전부인의 동향, 그리고 에오스그룹과 거래했거나 현재 거래 중인 기업 중에서 그룹으로부터 불이익을 당했다거나 거래가 중단된 기업들과 기업주, 특히 공기업 인수과정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업체와 그들이 탈락하게 된 배경 등 입니다. 인수과정에서 상당한 잡음이 있다고 알려져 있으므로 밝혀지지 않은 불법행위가 있었을 가능성이 다분하고 이것으로 인한 원한관계가 형성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나는 남회장의 신변과 주변 인물에 대한 조사를 해볼 예정입니다.”

마고도는 제기자가 말하지 않았더라도 그녀에 대한 세밀한 탐문조사가 단서를 찾는데 필요하다고 보았었다. 특히 제기자가 두 번 째 그녀를 만났을 때 그가 느꼈던 감정과 그녀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는 말의 의미가 단서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제가람은 마치 독순술을 익힌 것처럼 그녀의 입술을 보고 ‘참 묘하네. 어쩜 그리도 그 분의 이미지를 그대로 가지고 있을까?’라고 하는 혼잣말을 알아낸 것이다. 그녀가 말한 그 분이라고 표현한 사람의 정체도 파악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제가람이 ‘그분의 이미지’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한 점도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그녀가 풍겼다는 체취에 대해서다. 편집장과 함께 인터뷰할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던 것을 가람이 그녀와 단둘이 했을 때는 아찔할 정도를 넘어 사람의 정신을 좌지우지할 만큼의 강열한 힘을 가진 체취를 뿜어댔다고 했다. 이는 그녀의 선택적 의지에 따라 체취가 발현됨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고도는 우선 제가람이 조사했었던 남회장의 전 남편인 정영길에 대한 조사부터 착수했다. 정영길은 그보다 앞서 사망한 동업자인 제갈명사장과 함께 ‘신명자원’이라는 회사를 설립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이혼을 불사하면서까지 회사의 여직원과 결혼한 것은 흔하지 않은 유별난 사건인 것이다. 게다가 회사가 순탄대로를 달리고 있을 때 예상치 못한 살인을 저질렀고 결국 감옥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여기서 눈여겨 볼 사안이 있었다. 그저 개인적인 방어적 하소연이라고 넘겨짚기에는 다소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그는 사건 현장에서 체포되는 순간부터 재판에서 무기징역형을 받기까지 일관되게 자신이 함정에 빠진 것이고 절대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한 것이다. 오래 전의 일이고 이미 그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을뿐더러 규명하기도 불가능했다. 또한 그의 죽음이 남회장과 연계시킬 만한 고리도 없었다. 다만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원초적 근원이 있을지 파보기로 했다. 그의 예전 가족관계를 확인해보니 전부인 외에 아들이 한 명 있었다. 미고도는 아들인 정현수를 만나보기로 했다. 그는 제가람과 비슷한 또래였는데 현재 한 중견기업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별 거부감 없이 마고도의 요청에 응했다.

“유감스러운 말이지만 어렸을 적에 부모님이 이혼하셔서 힘들지 않았어요?”

“당시에는 별달리 느끼지 않았어요. 그저 아버지가 멀리 가 계신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어머니가 혼자 고생하셨지요. 나중에 안 것이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제 양육비는 지원했다고 하더라고요. 전 아버지를 그렇게 탓하지 않습니다. 남자라면 그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는 아주 긍정적인 사고의 소유자였다.

“살인사건 역시 아버님이 주장하는 바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어요.”

“부친이 모종의 덫에 걸린 것이라면 누가 무엇 때문에 살인혐의를 씌웠을까요?“

마고도가 묻자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전 남민희라는 여자가 꾸민 일이라고 확신합니다.”

마고도가 묻기도 전에 뒤이어 그런 추측을 하게 된 연유에 대해 설명했다.

“기억이 희미하기는 하지만 동업자인 사장이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난 뒤 집에 혼자 남았다는 아이를 집으로 데려왔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저와 비슷한 또래였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얘기가 잘 통했는데 얼마 뒤에 사라졌어요.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네요.”

“혹시 어디로 갔는지 얘기 들은 것은 없었나요?”

“아버지에게 물어보니 외삼촌이라는 사람에게 보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줄로만 알았지요. 나중에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는 달랐어요. 그 애한테는 삼촌이라든가 친척이 전혀 없는 것으로 아는데 갑자기 외삼촌이라는 작자가 등장했다는 것이죠. 어머니는 남민희라는 고년이 교사해서 한 짓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곤 했어요.”

“그럼 부친 건에 대해서도 들은 바가 있겠네요?”

“네... 아버지가 살인죄로 재판을 받고 있는 과정에서도 어머니는 남민희가 악녀라고 몇 번이고 말하고는 했습니다. 얼마든지 경찰에 손을 써서 철저한 수사를 유도할 수 있었는데 전혀 그러지 않았다. 또한 재판과정이서도 고급 변호사를 통원하여 형량을 최대한 낮출 수 있었음에도 전혀 노력을 쏟지 않았다고 흥분해서 욕을 해대곤 했지요.”

마고도는 그가 어릴 적에 들었던 제갈사장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는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정사장의 죽음과 관련한 이야기는 인지능력이 갖추어진 나이 때였으므로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의 모친이 남회장에게 원한을 품을 여지가 충분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근황을 물었다.

“어머니는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모든 것을 잊으셨어요. 이혼 후 시작했던 장사에 전념하고 계시죠.”

그는 덤덤히 답했다. 그런 상황으로 미루어 보건데 그의 모친이 남민희에게 끝없는 원망을 품고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남회장이 술수를 부려 제갈사장의 아이를 있지도 않은 친척에게 보낸 것이 사실인지 파악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정현수를 보내고 나서 마고도는 이 경위에게 연락했다. 정사장 전 부인에 대해 그 사이 조사한 내용을 간단히 보고받았는데 정현수의 이야기와 일치했다. 그녀에게서 제갈사장의 아들을 데려간 친척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있는지 파악해보도록 했다.

다음 날 아침 수사회의에서 이 경위와 오 경사는 마고도가 지시한 내용에 대해 보고했다. 정사장의 전 부인이 알기로 제갈사장부부는 3대 독자, 외동딸이었고 친인척들도 외국으로 이민을 가서 국내에는 그의 집안뿐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해 작은 아들과 함께 사망하자 남편이 큰 아들을 집으로 데리고 왔었다. 이름은 일량이라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외출했다가 돌아오니 아이가 사라졌다. 회사로 남편에게 물어보았다. 외삼촌이라는 사람이 사무실로 찾아와서 와서 자기가 맡아 키우겠다고 하며 데리고 갔다고 했다. 그 때 그녀는 남편이 무슨 짓을 한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집에 왔을 때 따졌다고 한다. 남편은 재산도 일부 나눠주었으니 더 이상 따지지 말라며 화를 냈다. 곰곰 생각해보니 남편이 자발적으로 한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왜냐하면 이미 회사에서는 남모라는 여직원과 남편사이에 염문이 자자하다는 말을 직원으로부터 들었기 때문이다. 남모라는 여직원이 사주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남편은 그런 짓을 할 정도의 악질은 아니었다. 이 말대로라면 남회장이 사주했건 정사장이 직접 했던지 간에 제갈사장의 맏아들은 외삼촌이라는 사람에게 입양되어 살아 왔을 것이다. 따라서 문제될 것은 없다. 다만 외삼촌이라는 사람의 존재여부는 누구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 석연치 않았다. 하지만 남회장 살인사건과는 직접적인 연결고리는 없으므로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서 정영길 건에서는 특별히 건질 것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두 사람은 에오스그룹과 관련된 기업과 인수합병에 참여했던 기업들의 임직원을 조사한 결과도 보고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한결같이 남회장의 능력과 미모에 대해 칭찬 일색이군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이겨보려 했지만 그분의 뛰어난 지략은 당해낼 재주가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당시에 남회장의 수법에 치를 떨었다는 사람도 있기는 한데 그렇다고 개인적으로 원한을 가졌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요. 자 그럼 방향을 바꿔봅시다. 나는 남회장의 다른 주변인물을 조사할 테니...”

그러면서 마고도는 이 경위와 오 경사에게 남회장과 관련된 자료는 모두 수집하도록 지시했다. 두 사람은 에오스그룹과 관련된 자료를 검색하였다. 그룹 홈페이지에서 주요 내용을 확인한 후 남민희, 신명자원, 제갈명 그리고 정영길로 검색하기로 했다.

먼저 에오스그룹을 검색한 결과이다. 신명자원이라는 회사를 모체로 한 그룹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반적인 그룹 현황에서 주요 임원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신명자원의 설립자인 제갈명과 동업자였던 정영길에 대한 소개는 아무데도 없다. 이외에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은 없었다. 남민희회장에 대한 것 역시 이미 알고 있는 것 외에 유의미한 내용은 없다. 남민희가 그룹형성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여장부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녀에 대한 비중이 상식이하로 적다. 그녀의 종적을 별반 남기려 하지 않은 듯 하다. 그룹 기획실 직원으로부터 은밀히 들은 바로는 그녀는 대외활동도 워낙 기밀하게 수행하였고 이의 내막을 아는 사람은 사장과 비서실장을 포함한 극히 일부 임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부러 베일에 가려놓은 것 같아 보인다. 이번에는 사건사고 데이터에서 ‘남민희’로 검색했다. 검출된 항목에서 그녀와 연관된 것으로 추정되거나 에오스와 관련된 것들을 찾아보았다. 정영길 건은 거기에서 묻어 나왔다.

첫 번째로 튀어나온 것은 그녀 아버지인 남지욱 화재사망 건이었다. 집에 화재가 났었으나 그만 빼고 다친 사람은 없었다. 그녀 성명이 걸려나온 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생명보험과 집 화재보험이 가입되어 있었는데 터무니없게도 수혜자가 남민희로 되어 있었다. 보험금은 당시로서도 무척이나 큰 금액이었다. 보험 가입 건은 그녀가 보험회사에 근무한다는 것을 참작한다면 그럴만하다 여길 수 있다. 헌데 남편이 보험에 가입했다는 것도, 수혜자가 딸이었다는 것도 그녀 어머니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는 점은 개운하지 않다. 의붓아버지에 대한 사망사건 역시 미심쩍은 부분이 있기는 하다. 화재감식 후 남지욱이 술에 취해 잠든 사이 피우던 담뱃불에 의한 것으로 결말이 나서 별 문제없이 종결되었으니 이도 더 이상 다툼의 여지는 없게 되었다.

두 번째 연계된 건은 선계윤이라는 레지던트 실종사건이다. 그녀는 그와 사귀고 있었던 탓으로 제일의 용의자로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선계윤이 자취를 감추기 전에 휴가를 내고 집에서만 있었던 것으로 알리바이가 입증되어 이 역시 무혐의로 끝났다. 선계윤은 시신조차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세 번째 건은 어째 유난하다고 여겨지는 살인사건이다. 경주시소재의 호텔에서 발생했다. 살해범은 정영길이었는데 남민희 이름이 뜨게 된 것은 그의 부인이었던 까닭이다. 그가 지방출장을 가면서 애인을 데려갔었던 것이 화근일 수 있다. 경찰에 따르면 울산공장을 시찰한 후 임원들과의 만찬에서 술을 거나하게 마신 정회장이 호텔에 와서도 거듭 술을 마시다가 불거진 다툼이 원인이었다.

그녀가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던 터라 임신 중인 아이가 남의 씨일 수도 있다면서 추궁하게 된 것이 발단이었다. 여자가 그의 추궁에 반발하자 격노하여 마시던 술병으로 그녀의 머리를 쳐서 즉사케 했다. 본인은 아침에 깨어보니 그런 상황이었을 뿐이라고 극구 부인했으나 이를 뒤집을만한 물증은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경찰은 범행현장을 조사한 결과 그가 만취하여 부지불식간에 저지른 것으로 종결지었다. 이례적으로 신속히 진행된 재판에서도 끈질기게 무죄를 주장했으나 최종심에서 무기징역형이 확정되자 옥중에서 자진하여 목숨을 끊고 말았다.

이와 같은 일들은 그녀가 치부로 여길 수 있다. 그 중 특히 밀접하게 연루된 선계윤과 정영길 건은 그녀가 단단히 단속을 하게 된 충분한 빌미이지 않겠는가. 아리송한 부분은 있었다. 첫째는 보험사 직원이었던 남민희가 어떤 경로로 정영길의 부인이 되었는가, 둘째는 정영길이 실제로 사소한 다툼 끝에 살인을 저질렀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런데 이게 다 아닐 수 있는 사건이 또 하나 있다. 그녀가 관계되었는지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중대하다면 아주 중대한 건이다. 제갈명으로 검색하여 나온 사고 건인데 교통사고로 제갈사장부부가 사망했다. 이 사고가 발생한 것이 그녀가 회사에 입사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때이다. 이처럼 은밀한 면이 많은 여자라면 이 교통사고에 부정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았을까? 단순한 사고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녀와 연계된 사건 사고가 여러 건이다 보니 의문의 여지가 있다. 특히 이 사고는 그녀가 신명자원으로 입사하고 난 뒤에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그녀의 입사경위는 물론 정영길과 결혼하게 된 경위도 알아볼 필요가 있다. 또한 이의 조사를 위해서는 그녀의 안테나에 잡히지 않게끔 해야 한다.

이 경위와 오 경사는 연관성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그 당시 회사에 근무했었던 사람을 찾아보기로 했다. 두 사람은 정영길의 전 부인을 다시 찾아갔다. 남민희가 입사한 때 근무하던 직원들 중에 기억나는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녀는 기억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회사일로 집안을 자주 드나들던 직원을 생각해 냈다. 다행히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장기근속을 하다가 그룹의 한 자회사에서 임원으로 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그에게 협조를 요청하였으나 잠시 머뭇거렸다. 자신에게 무슨 혐의가 있어서 그러나 싶어 공연히 찜찜해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남회장사망사건 수사 때문이라고 하니 이내 태도가 바뀌어 질문에 적극적으로 응했다.

남민희는 제갈사장부부가 사망하기 약 1년 전 회사에 들어왔는데 제갈사장부부 사망이후 정영길이 단독 경영권을 쥐게 되면서 그와 결혼했다고 한다. 전직 동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정영길과 결혼한 것으로 보아 그가 연루되었을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녀가 금융기관인 보험회사를 마다하고 당시 규모가 비교도 안 되던 중규모의 기업으로 옮긴 것이 정영길과의 결혼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알고 보니 그녀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실종사건의 주인공이었던 선계윤이라는 인턴과 사귀고 있었었다. 사귀던 사람이 기묘하게 실종됨에 따른 충격의 후유증일 수도 있겠으나 처녀가 유부남이었던 그와 결혼한 게 단순하게만 보이지 않았다. 정영길이 바람둥이여서 그녀와 불륜의 관계를 맺었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도 멀쩡한 가정을 두고 이혼까지 하면서 그녀와 결혼한 것 역시 피치 못 할 사정이 있을 듯했다. 직원의 이야기는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궁금했던 점은 풀렸지만 아쉽게도 이를 남민희사망사건과 연계시킬만한 결정적인 끄나풀은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도 아무런 소득 없이 허탈하게 끝내야 했다.

수사가 전혀 진척을 보이지 않고 답보상태에 놓이자 모두들 기운이 쭉 빠졌다. 마고도는 그동안의 자료를 다시 훑어보며 허점이 무언지를 따져보았다. 세 가지로 압축해보았다. 제갈사장과 관련한 것이 두 가지였다. 그 중 하나는 본인의 죽음이다. 제갈사장의 죽음으로 덕을 본 사람은 일차적으로는 정영길이고 이차적으로는 남민희이다. 그런데 제갈명은 누군가에게 피살된 것이 아니라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그러므로 제갈사장의 죽음과 득을 취한 것에는 상관관계가 없다. 또 하나는 그의 맏아들의 행방이다. 정영길의 전부인 말을 액면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 아이는 친척에게 입양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면 과연 어디로 갔을까? 정영길이나 남민희의 음모에 따른 것이라면 범죄단체의 희생양이 되었을 수도 있다. 이는 극단적인 상황이지만 그렇지 않고 고아원 같은 곳으로 갔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제가람기자가 떠올랐다. 그는 분명 고아였다고 했다. 더구나 성씨도 그다지 흔하지 않은 제갈씨다. 제갈명사장과 같다. 하지만 그 아이 이름은 제일량이라고 하였으니 이 부분에서 막힌다. 나머지는 극단적인 추측이기는 하지만 그룹소속의 직원 중에 남회장으로부터 심한 불이익을 당하여 원한이 사무쳤을 경우이다. 마고도는 세 번째로 수사방향을 잡기로 했다.

일차 대상은 현 에오스팜의 전신인 신명자원 즉 그룹 모태회사로 정했다. 남민희가 처음 입사했던 회사이므로 그 때부터 함께 했던 직원들이 그래도 상관관계가 클 것으로 판단했다. 즉시 수색영장을 발부받아 이경위와 오경사를 그 회사로 보내 설립당시부터 현재까지 재직했던 직원명단과 회사에 문제를 일으켰던 직원현황 및 퇴직한 인원명단도 입수하도록 했다. 문제 직원은 그 사유도 상세히 기록하도록 하였다.두 사람은 이 자료를 분석하느라 며칠을 보냈다. 유의 대상자는 현직이건 퇴직자이건 신상조사를 세밀하게 하였다. 별 다른 성과가 나타나지 않은 채 리스트의 숫자는 계속 줄어갔고 겨우 10여 명만 남았다.

마고도는 유의대상자 리스트를 재검토하고 있었는데 어디서 본 듯한 이름이 나타났다. 사건기록을 검색해보니 한 달 전 쯤 발생한 식중독사건과 연계된 인물이었다. 상한 음식을 먹고 식중독으로 사망했다는데 우연인지 몰라도 그의 이름이 조용진이었다. 산동네 쪽빵촌에서 기초생활수급자 급여를 받으며 근근이 살고 있다가 참변을 당했다고 했다.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도 있었으나 그가 운수반에서 근무하면서 술주정을 부리는 등 상당한 말썽을 피웠다는 기록이 눈길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정영길 전부인이 소개해준 그 직원을 다시 찾아갔다. 그의 증언으로 의외의 사실이 드러났다.

조용진은 제갈사장 사망 후 곧장 회사를 그만 두었는데 그게 좀 미심쩍었다. 운수반에 근무하던 그는 살림살이가 곤궁했었다. 그럼에도 술만 먹었다 하면 행패를 부리기 일쑤여서 다른 곳에 쉽게 취직하기는 어려운 처지였다. 그나마 제갈사장이 봐주어 그럭저럭 회사에 버티고 있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회사를 그만 둔 것은 믿고 있던 제갈사장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했었다. 그 후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가 서울 근교에서 비교적 큰 음식점을 차렸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복권 따위에 당첨되었다는 말은 없었는데도 말이다. 궁색했던 그가 회사를 그만 둔 뒤 자금이 많이 소요되는 음식점을 개업한 데는 모름지기 큰돈을 만지는 계기가 있었음이 명백했다. 그럼에도 그는 돈이 하늘에서 굴러 떨어졌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 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망했다는 소문이 돈 후 그의 행방은 묘연했다. 그 직원은 조용진이 사망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제갈사장의 사망과 회사 퇴직 그리고 돈이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말에서 왠지 범죄의 냄새가 풍기는 듯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이제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으니 그것으로 끝이 아닌가. 그래도 그의 옛날 행적과 뜻밖의 죽음에서 실낱같은 단서라도 잡아보자고 했다. 마고도는 이 경위와 오 경사에게 그가 살았다는 곳으로 가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정보를 입수해보도록 했다.

두 사람은 마침 몇 집 건너 집 앞에 나와 앉아 있는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를 보고 부탁을 했다. 그녀는 조용진이 죽기 전에 있었던 일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며 말해주었다.

“그 사람이 죽기 전날 남자 두 사람이 다녀갔어. 평상시에는 개미새끼 하나 얼씬거리지 않았는데 이상했지.”

“혹시 생김생김이라든가 인상착의 같은 거 기억나시는 거 있나요?”

이 경위가 물어보자 할머니는 머뭇거림 없이 답변했다.

“먼저 온 남자는 젊은이였는데 정장차림에 외모가 번듯했어. 그런 사람이 찾아올 곳이 아니라서 궁금하더라고. 그래서 조용진이 소변을 보러 나왔을 때 물어봤지.”

오경사가 담배한대를 꺼내 할머니에게 건네고 불을 붙여주었다. 나이에 비해 기억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있는 사실을 모두 얘기해주리라 하는 기대감이 충만해서였다. 또한 그녀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함이기도 했다.

“변호사인데 재산반환소송 건을 맡았다는 거야. 그래서 자기한테 알아볼 것도 있고 도움도 청할 게 있어 왔다누만. 게다가 요번 일이 잘만 되면 자기에게도 한 몫 돌아갈 수 있다고 그러더래. 구미는 당겼지만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되서 돌아가라고 했다는 거여.”

할머니 말이 끝나자 이 경위는 가람의 생김생김에 대해 설명해주고 그렇게 생기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거의 비슷하다고 말했다. 이 경위는 가람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무언가를 취재한답시고 변호사라고 사칭했을 것이다.

“두 번째 온 남자에 대해서는 뭐라 하던가요?‘

이 경위가 다시 독촉했다.

“그 남자는 큰 모자를 썼고 마스크도 하고 해서 정확하게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더라고. 더구나 어둑어둑해져서 말이지. 근데 여자의 직감이라는 게 있잖아? 무척이나 곱상하게 생긴 것 같았어. 거 뭐냐, 동성연애하는 남자애덜 있잖아. 바로 그런 느낌이었지. 근데 도대체 그런 사람이 조용진이 같이 개 같은 녀석을 찾아왔을까 되게 궁금하더라고. 그 남자는 큼지막한 쇼핑봉투를 들고 왔는데 방에도 안 들어가고 밖에서 조근 조근 얘기하더니 금방 돌아갔어. 조용진이 배웅하는데 뒤도 안 돌아보고 가더라니까. 배웅하는데 보니까 조용진이 모처럼 웃고 있더라고. 그래서 물어보았는데 그 남자에 대해서는 한 마디 말도 안 해.”

할머니는 말을 마치자 누가 오기로 해서 그만 들어가 봐야겠다면서 자리를 떴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고 두 번째 남자의 정체를 추리해보았다. 그러나 답이 나오지 않았다. 더구나 그의 죽음과 연계성도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갑작스럽게 두 남자가 찾아온 점은 분명 간단히 넘길 사안은 아니다. 더구나 그 중 가람으로 추정되는 인물은 변호사행세까지 하면서 그로부터 무언가를 캐내려하지 않았는가. 그에게 숨겨진 비밀이 없다면 구태여 그를 찾아올 이유가 없을 것이다. 가장 강력히 시사하는 바는 제갈사장의 죽음에 찍힌 의문부호였다. 교통사고와 관련한 당시의 신문기사를 보면 그는 부인과 두 살배기 아이를 데리고 친구의 부친상 조문을 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길이 제법 험한데다가 야간이었기 때문에 시고의 개연성은 컸다고 할 수는 있다. 그러다보니 경찰에서도 운전미숙으로 인한 사고사로 규명하고 있었다. 한 가지 미궁으로 남은 것이 있었다. 어린 아이의 행방을 찾지 못한 것이었다. 경찰은 아이가 타지 않은 것으로 추측했다. 그 당시 직원들의 증언이 있었고 애가 차에 있었으리라는 물적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회장과의 죽음과는 전혀 관계없다고 보인다. 그래도 아이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 전혀 엉뚱한 사안이 아닐 수도 있으므로 계속 풀어볼 충분한 사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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