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굴로 들어간 한가람 기자
52. 남민철(계속)
“한 27년 전 인가였었나?
나는 술주정으로 큰 사고를 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목돈이 필요한 상황 이었더랬지. 돈 마련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데 하루는 조용희가 단 둘이 좀 만나자고 하더라고.
그 여자는 그 당시 경리부 과장으로 있었지만 끗발이 있었지. 부사장과의 썸씽도 알게 모르게 돌고 있었고.
그런 여자가 갑자기 나를 보자고 하니 이상하더라고.
속으로 '이 년이 나한테 무슨 볼일이 있어 그러냐?' 싶기는 했지만 혹시나 해가지고 만나자고 한 한정식 집으로 갔지.
한 동안 나를 떠보더니만 유사장부부를 처리해달라고 하더라고. 그리고 돈뭉치가 든 두툼한 가방을 내밀데. 일이 끝나면 뒷일도 자기가 다 보살펴준다는 다짐까지 하면서 말이야. 당시 내 처지를 생각하니 그 제의를 덥석 물게 되더라고. 돌아오면서 확인해 보니, 보통 액수가 아니더라고.
그런데 내가 직접 일을 하기에는 좀 벅차고 다른 두 놈을 끌어들여 맡겨도 되겠다고 생각했지. 그래 즉각 연락을 했지.
다음 날 친하게 지내는, 덤프트럭 모는 놈 두 놈을 일식집으로 불러내어 잔뜩 술 먹이고 나서 본론을 말했지.
그랬더니 두말 안하는 거야. 아주 쉬운 죽 먹기라고 말야.
그런데 마침 유사장이 시골 갔다가 밤늦게 돌아온다는 걸 알고 그 날 실행한 거지.
나는 절대로 증거를 남기지 말고 깜쪽 같이 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는데 내가 생각하기보다 너무 완벽하게 처리했더라고.
그 뒤 회사에 남아있기도 뭐하고 해서 당장 때려치웠어. 서울 사는 사촌 형의 소개로 시장에서 가게를 내 장사를 시작했는데 목이 좋아 엄청 잘됐어. 그런데 문제는… 옛날 버릇이 그대로 나오는 거야. 계집질에다 노름판에다…….”
순간 남민철의 머릿속에, 룸살롱에서 가슴을 거의 드러낸 여인과 어울려 질펀한 술파티를 벌이는 모습, 그리고 여러 사내들이 뿌연 담배연기 속에서 화투장을 들고 있는 사이로 담배를 꼬나물고 지긋이 화투장을 보고 있는 남민철 자신의 모습이 순식간에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게 옛날의 화려했던 모습에 잠겨 잠시 말을 잊고 있던 남민철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마치 최후의 발언을 하는 것처럼 웅얼거리듯 말했다.
"흐휴, 그러다가 모든 것 다 날리고… 그나마 조금 남은 건 여편네가 박박 긁어 날라 버리고… 하루아침에 백수 날거지 신세, 이 모양 이 꼴이 된 거지.
어찌 보면 그래, 지금 내가 그 죄 값을 아주 톡톡히 받고 있는 거지.
그런데 조용희 그년도 그렇고 성은철도 그렇고 모두 지독한 년 놈들이야. 글쎄 유사장 애들을 모두 고아원으로 보내버리고 행방불명된 것처럼 꾸몄더라고."
자세한 내막은 알았지만 한기자의 마음은 더욱 착잡해져서 표정이 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세월이 너무 오래 지났고 한 순간, 평화롭던 한 가정을 파괴한 원흉은 그 동안 승승장구하여 이 사회의 상류에서 버젓이 행세하고 있는데 과연 이에 대해 조치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그러면서 무슨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던 한기자는 조용희에게서 무슨 꼬투리라도 잡아 보려면 그녀와 직접 대면해볼 필요가 있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53. 조용희
검은 먹구름이 공간에 꽉 채우고 있으면서 몇 차례 세찬 소나기를 퍼부었다. 촉촉이 적은 주변의 낮은 건물들 사이로 30여 층 빌딩이 당당하게 우뚝 솟아있었는데 검푸른 빛을 띤 불투명한 유리가 외부를 온통 뒤덮고 있었다. 유리는 빗물을 길게 흔적을 남기며 흘려 내리면서 흐르는 구름들의 움직임을 반사하고 있었다.
순간 햇빛이 구름 속에서 흘러나오면서 널찍한 창유리가 햇빛에 반사되어 커다란 보석덩어리처럼 반짝거렸다. 그 건물의 지하 주차장 출입구로 건물의 위풍당당함에 짓눌린 듯 우물쭈물 작은 승용차 한대가 막 들어서고 있었다. 바로 한기자의 차였다.
얼마 후 웅장한 건물내부의 엘리베이터에서 한기자가 내려 비서실로 향하고 있었다. 고문실 앞에서 책상에 앉아 있는 여비서에게 신분을 밝히고 찾아온 용건을 얘기했다.
인터폰으로 그 내용을 보고하는 그녀는 나이가 20세 정도밖에 보이지 않는 데도 업무처리를 하는 모양이 매우 능숙하게 보였다.
그의 옆 편으로는 검은 양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젊은 사내 둘이 조용하게 비서실 부근을 왔다 갔다 했다. 보고가 끝나자 그녀가 고문실로 안내했다.
한기자는 깜빡 그가 만나고자 하는 대상이 남민철이라는 인간이 말하던 그 여자가 아닌 착각이 들었다. 그러자 이 곳 분위기에 슬며시 압도당했다는 패배감이 자신도 모르게 화게 나게 만들었다.
비서가 문을 열고 한기자를 내부로 안내하고 가벼운 목례와 함께 고문실 밖으로 빠지는데 그녀는 이미 응접소파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하는 바람에 한기자는 또 다시 당황했다.
소문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미끈한 외모였다. 나이는 그녀와 아무 관계가 없는 듯했다. 웬만한 미녀 뺨치는데다가 많은 돈을 들여 몸 구석구석을 단장했을 것이니 당연히 미모가 한층 돋보일 것이었다. 게다가 보통 사람들이 갖출 수 있는 정도의 명품이 아닌 정말 세상에서 몇 안 되는 그런 명품으로 온 몸을 치장하였으니 조그만 왕국의 왕비나 공주에 비교할 바가 못될 것이었다.
그녀를 보자마자 주눅이 들었던 한기자는 곧 자신의 줏대를 세우면서 편안하게 인사했다.
"이렇게 고문님께서 직접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정중한 인사에도 불구하고, 그가 방문한 이유를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떠올리는 냉소적인 미소는 아름다운 미모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한기자는 엄청 아름다운 장미지만 그 가시가 너무도 독하여 아무도 근접하기 어려운 스타일로 판단되었다.
"우리 그룹의 발전사를 취재하신다고 했는데 최근에 불거진 불유괴수라고 불리는 그것 때문에 그런 건 아닌가요?"
한기자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가 제일 먼저 불유괴수를 취재하여 터뜨린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이미 확인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또 ‘참 대단한 여자다.’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부러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그녀를 보면서 조심해야겠다고 다시 자신을 추슬렀다. 그러면서 그 말을 받고 여유 있는 표정으로 웃으며 답했다.
"그거야 불유괴수의 원조인 젬트리를 탄생시킨 주역이 엠그룹이니까요. 사실 그게 이상하게 변질만 되지 않았다면 정말 젬트리는 획기적인 기념물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한편으로는 그런 것을 탄생시킬 수 있는 엠그룹의 저력도 감탄스럽구요.
그래, 그룹 성장사와 겸사해서 그에 대한 비화도 얘기해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그렇게 말은 하면서도 한기자는 이곳에 오기 전에 엠그룹의 외견적인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방문했던 한 경영연구원에서의 인터뷰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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