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창작스토리

아픈 과거는 어두운 긴 그림자를 남긴다 (파이토레이드(PHYTORAID) (제47회))

by 허슬똑띠 2022. 9. 2.
반응형

 

야릇한 미소 속의 비밀

 

55.복수(계속)

 

이에 응하는 조용희 말은 차가울 정도로 냉정하다.

"결혼해줄 거냐고 물었을 때 그런다고 대답했잖아요?"

잠시 한숨이 을러 나온다.

"이봐! 그건 이리저리 변명하기 싫어서 건성으로 대답했을 뿐이야. 앞으로 바보처럼 굴지 마!

그것도 그렇고 나 레지던트 끝내려면 아직 멀었어!"

그러자 조용희의 목소리가 사정조로 변한다.

"제발 그러지 말아요. 제가 모든 거 뒷바라지 다 해드릴게요."

"엉뚱한 소리 하지 말고 낙태시켜! 내가 돈 보내줄 테니까!"

그녀는 갑자기 시야가 흐려지는 듯 했다. 안개가 자욱한 숲 속을 헤매는 것처럼 막막한 느낌이 엄습해왔다. 그러나 곧바로 정신을 가다듬고 낮지만 단호한 어투로 답한다.

"안 돼요! 당신과 나의 소중한 아인데 그럴 순 없어요!"

울컥 짜증내는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울려 퍼진다.

"아이는 언제든지 또 낳을 수 있잖아. 시키는 대로 해!"

그러면서 전화기를 끊는 철컥 소리와 동시에 남겨지는 뚜 소리.

조용희가 한동안 전화기를 붙잡은 채 멍하니 있다가 중얼거린다.

"낙태시키라고? 아니 그 말이 그렇게 쉽게 나와?"

그러면서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지면서 ‘안 돼!’ 라는 소리를 지른다. 다만 내부 깊숙이 잠겨들 뿐이다.

 

며칠 후 각종 화공약품상점들이 즐비한 청계천 상가에 조용희가 나타난다. 그녀는 무언가가 적혀 있는 종잇조각을 들고 주변을 둘레둘레 휘둘러보다가 한 가게로 들어간다.

가게 안에서 그녀가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고 있다.

나무문짝이 달려 있는 가게 내의 조그만 방에서는 사장과 손님이 조그만 탁자에 마주 앉아 열심히 계산기를 두들기며 얘기하는 모습이 문 상부 쪽 유리창 너머로 보인다.

주의 깊게 살펴보던 그녀가 손을 쭉 뻗는다. 그리고 꺼낸 든 약병 겉에는 'Dichromic Acid'라는 문구가 영문으로 쓰여 있다.

그 이름과 종잇조각의 글씨를 대조해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얼굴에는 기묘한 미소가 번진다.

그런 다음 방을 들여다보며 '가죽 용해용 약품은 어디에 있나요? 라고 묻는다.

그러자 사장이 방에서 나와 많은 화공약품들이 진열되어 있는 진열장 한 구석에 있던 병을 꺼내 온다.

 

그 다음 날 오후에 아무에게도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면서 조용희가 다소 음침한 건물 지하에 위치한 병원의 약품창고로 향한다. 그녀가 쥐고 있는 손안 엄지 사이로 키의 일부가 보인다.

어떻게 구했는지 모르지만 그 키를 자물쇠에 집어 놓고 돌리자 별다른 거부반응 없이 열린다.

조심스럽게 이리저리 창고 안을 돌아다니며 들러보다가 본인이 찾는 것을 발견했는지 진열장 한 곳으로 다가간다.

그 앞에 서서 유리문을 열더니 약병을 몇 개 꺼낸 다음 들고 있는 가방에 집어넣는다.

그리고 천천히 창고를 나와 조심스럽게 문을 잠그고 빠른 걸음으로 그 부근을 벗어나는 조용희.

 

얼마 후 휘황한 불빛이 깔려오는 어둠과 벅찬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혼잡한 퇴근시간대의 도심이 나타난다.

북적대는 인파와 줄을 이어 몰려드는 수많은 버스들에서 뿜어대는 열기로 후덥지근하게 느껴진다.

도시 외곽으로 나가는 좌석버스 정류장 부근의 공중전화 박스에서 전화를 하고 있는 젊은 여인의 옆모습이 보인다.

일반인이 선뜻 사 입지 못할 정도의 비싼 브랜드 정장으로 단장하였고 부드러운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귀걸이에는 작지 않아 보이는 보석이 박혀있는데 건물의 불빛에 반짝대고 있다.

'말씀대로 하겠어요. 억지 부려 정말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사과드리는 뜻으로 집에서 대접할게요. 내일 밤 시간 좀 내주세요, 꼭요! 네, 고마워요. 집에서 기다릴게요.'라는 소리가 함께 전화기를 내려놓고 문을 열고 나오는 여인은 다름 아닌 조용희다.

뜻 모를 회심의 미소가 얼굴에 번지는 가운데 오가는 사람들로 분비는 것에는 아랑곳없이 그들 속에 섞여 버스정류장으로 향한다.

 

그녀가 버스를 타고 그 곳을 떠난 뒤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수시로 번개가 하늘을 가르기를 반복하면서, 마치 독일의 열차포가 그 거대한 포를 쏘아댈 때마다 울려 대는 것과 같은 천둥소리를 몰고 왔다 가곤 한다.

이와 함께 주변이 온통 물바다를 이루고 있고 이 때문에 하늘과 땅의 경계가 불분명하게 보인다.

다만 어둠 속에서도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장대비가 도로에 흘러넘치는 빗물에 무늬를 그리듯 튀겨 오르며 그나마 여기가 대지인가보다 알 수 있을 정도다.

버스가 다니는 도로부근의 가옥들이 밀집되어 있는 주택가에서 100여 미터 정도 약간 경사진 길을 올라가면서 집들이 드문드문해 진다. 그 부근에 있는 서너 채의 집에는 창문에 불빛이 비치고 있는데 한 곳의 집은 불빛 한 점 없는 가운데 비의 장막 속에 희끄무레하게 서 있다. 마치 유령의 집처럼…….

그 집의 욕실 문 앞에 조용희가 팔짱을 끼고 무표정하게 서있다. 갑자기 천둥번개소리와 함께 세친 빗소리가 들리며 주위가 어두워져 간다.

 

조용희가 잠에서 깬 듯 한 얼굴로 시계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누군가 그랬지! 내일(來日)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과거기억은 과감히 떨쳐내라. 지당한 말씀이야!'

그녀의 일과가 항상 일정한 틀 속에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오늘은 한기자와의 인터뷰가 생각지 않게 길어지는 바람에 바디 클리닝 센터에 가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그녀는 휴대폰으로 전화를 하면서 누군가에게 그리로 나오라고 일방적으로 명령하듯 말했다.

인터폰으로 차를 대기시키라고 지시하고 난 뒤 '기분이 엉망인데 오랜 만에 그 사람과 술이나 한잔해야겠다.'라며 집무실을 나섰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