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질긴 한가람의 추적
56. 남민철의 최후
한기자가 남민철을 방문하고 난 뒤 며칠이 지난 저녁의 골목 언덕길에, 캐주얼 복장에 모자를 푹 눌러 쓴 남자가 그림자를 앞서 거니 뒷 서거니 하면서 비닐 봉투를 들고 올라오고 있었다.
방범 등이 드문드문 좁은 길을 밝히고 있으나 골목길을 지나는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키가 평균보다 커 보이는 그 남자는 남민철의 집 앞에 다가가더니 주의를 살폈다. 조심스럽게 문 안의 빗장을 열고 들어가 조그만 마루 위에 그 봉투를 놓은 다음 다시 조심스럽게 밖을 살피더니 재빨리 나와 사라졌다.
그 사람이 봉투를 몰래 두고 간지 30 여분쯤 지난 후 남민철이 소변을 보기 위해 방문을 열고 나오다 그 것을 발견했다. 그가 봉투 안을 보니 소주 세 병과 통조림 두 개가 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종이쪽지 같은 것이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한 그가 그것을 끄집어내어 펴보았다. 방안에서 나오는 불빛으로 종이쪽지를 비춰보는데 '한기잡니다.' 라고 글씨가 검은 사인펜으로 크게 휘갈겨 쓰여 있었다.
그는 '웬일이람?'이라고 중얼거리며 쪽지를 구겨 쓰레기가 담겨 있는 종이 박스로 집어 던졌다. 구석에 쌓여있던 종이박스 위에다 오줌을 내깔긴 그는 그 봉투를 들고 들어가면서 '에이 사오려면 많이 좀 사오지 쪼잔 하게 이게 뭐야'라고 구시렁거렸다.
그 다음 날 저녁.
국내 제일의 부자촌이라고 일컫는 강남 모처의 높은 오피스텔 출입문을 열고 홀 안으로 건장한 중년의 남자가 들어섰다.
한 편에 설치되어 있는 경비실에는 경비원 몇 명이 서성이고 있지만 그는 이들을 무시하고 곧바로 비상구 쪽으로 향했다.
그의 손에는 석간신문이 들려져 있었다. 잠시 후 계단으로 걸어올라 온 남자는 한 룸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스위치를 켰다.
출입구 바로 옆의 화장실 겸 욕실을 지나면 창가 쪽으로 싱크대와 책상이 놓여 있는데 창문에는 커튼이 내려져 있었다. 한 옆으로 이층 침실로 올라가는 계단이 설치되어있고 바로 옆에 옷장이 있었다.
그는 책상 위에 신문을 던져 놓고 옷을 벗어 옷장에 걸어 놓은 다음 책상에 앉아 신문을 펼쳐들었다.
신문의 한편에 두 줄짜리 신문 기사가 나있었다.
'K동의 단칸방에서 살던 남민철(59)씨가 식중독으로 사망했다. 생활보호대상자 갱신 건 때문에 방문했던 통장이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고 한다.'
사내는 책상 위의 노트북을 켜더니 뉴스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거기에서도 같은 내용의 기사를 확인한 그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조치가 끝났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창가로 가서 커튼을 약간 열어 제쳐 밖을 내다보았다. 열려진 커튼사이의 창유리에 흐릿하게 비치는 얼굴 이미지가 언젠가 연구소에서 사이먼 우드뱅크 유라온 박사에게 식사를 가져다주었던 사람 모습과 비슷해 보였다.
같은 시각 한기자는 신문사 데스크에 취재기사를 넘겨주고 난 뒤 내일을 위한 취재자료를 재빨리 정리했다. 그런 다음 피시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유라온 박사 추적 계획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인터넷에서 기사들을 검색하는 도중 남민철의 사망 기사를 발견하고는 한기자는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머리를 굴려보았다.
'이건 분명 화근을 없애고자 하는 조용희의 짓일 거야. 그런데 이렇게 신속하게 일을 벌일 줄이야.'
한기자는 휴대폰에서 전화번호를 검색하더니 전화를 걸어 정보 수집을 부탁했다. 얼마 안 되어 그의 친구로부터 소식이 날아왔다.
"응 나야! 좀 알아봤어?"
"경찰이 도착했을 때 남민철의 방은 난리도 아니었다는 거야. 소주병과 캔 통조림 그리고 오바이트 해놓은 게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는데 남민철은 몸부림을 치다가 완전 오그라져 있었다는군.
경찰이 먹다 만 소주와 캔 찌꺼기를 수거해 확인해 보니까 통조림이 부패돼서 보튤린 독이 퍼져 있었다는 거야."
"보튤린 독?"
"통조림이 상하면 발생하는 독인데 근육수축이나 경련을 동반하며 사망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거야."
"그래? 그런데 그 사람은 그것을 어디서 났데?"
"생활보호대상자 갱신이 늦어져 먹을 것이 없다 보니 오래돼서 버린 걸 주워 온 것 같다는 거야."
"그것참…잘 알았어, 고마워!"
그리고 턱을 고이고 컴퓨터 모니터의 그 기사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꼭 도깨비에 홀린 것 같은 이 느낌은 뭐지? 갑자기 썩은 통조림이 등장하고 식중독 사망이라? 뭔가 아주 절묘하다는 생각이 들어. 이거 추적에 속도를 내야지 안 되겠는 걸. 이 참에 얼마 전 그 회사에서 퇴출당한 임원하고 친구인 선배에게 부탁해야겠다."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리자마자 곧바로 그 선배에게 연락하는 한기자.
"안녕하세요? 선배님! 저 한가람입니다. 예~~ 예~~ 산배님도 별일 없으시죠? 다름이 아니라 저번에 전화상으로 잠간 말씀드리다 말았던~~~ 아, 예~~ "
그러면서 그는 메모지를 끌어당긴다.
"정말이십니까? 선배님, 정말 고맙습니다! 예, 불러주십시오. 예, 예! 예, 정말 감사합니다. 이번 일 마무리되면 찾아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통화를 끝내자마자 메모지를 보면서 숫자판을 눌러댔다.
잠시 후 한기자는 '그럼 내일 다섯 시에 그곳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라며 통화를 끝냈다.
57.조용희의 숨겨진 과거
큰 거리에 면한 쪽과 좁은 도로에 면한 일부분이 넓은 유리로 장식되어 내부가 탁 트여 보이는 커피숍의 출입문을 열고 부랴부랴 한기자가 들어섰다.
이곳은 부도심에 위치하고 있는데도 부근에 많은 사무실이 자리하고 있어서인지, 상당히 넓어 보이는 홀에는 손님들이 꽤 북적였다.
한기자가 한 쪽 구석에 자리 잡고 앉아 연신 출입문을 바라보다가 얼핏 휴대폰으로 다섯 시가 되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출입문이 열리면서 한 노인이 들어 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들어오는 노인에게 다가가 인사하면서 한기자가 안내하여 함께 들어 왔다. 주문한 커피를 가져와 탁자에 놓자마자 한기자가 명함을 꺼내어 내밀며 인사했다. 노인이 조용히 명함을 바라보고 있을 때 먼저 말을 꺼냈다.
"이렇게 나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 선배님과 동기시라는 얘기를 듣고 부탁을 드렸죠."
"그룹에서 퇴출당하고 나서는 모든 걸 잊고 지냈는데 갑자기 그 친구한테 전화가 와서 부탁을 하니 좀 당황스럽데요."
"죄송합니다. 엠그룹에 대한 특집기사를 준비 중이라 서요.
그런데 이것저것 살펴보다 보니 애매한 것들이 꽤 있더라고요.
정확성이 신문의 생명인데 난처하데요. 그래서 그룹의 역사를 알고 계신 분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리고 내친 김에 조용희씨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스토리도 알고 싶고 해서요……."
주저리주저리 얘기를 늘어놓는 한기자의 얘기를 듣는지 마는지 노인은 말 없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의 표정에는 다소간의 망설임이 어려 있는 듯 했다. 한기자는 끈기 있게 기다렸다. 계속 말없이 창밖만 무심히 바라보다가 드디어 생각을 갈무리 했는지 천천히 입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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