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삶의 시작
집은 의외로 서울 외곽지역의 꽤나 비싼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동네와는 다소 외떨어진 숲속에 가려져 있었고 입구에서 잘 보이지 않았다. 폴라가 앞장서서 전혀 인기척이 없는 집안으로 들어섰다. 사람이나 애들이 있다면 소리가 날텐데 이상했다. 뒤따라 들어가면서 집안을 휘둘러보다 인기척소리에 순간 멈칫했다. 폴라가 소리나는 방의 문을 열고 라온에게 손짓했다. 놀랍게도 방안에는 이제 한 두 살정도 된듯한 어린아이 셋이 특이하게 생긴 보행기를 타고 장난치면서 놀고 있었다. 폴라를 닮아서인지 예쁘장하게도 생겼다. 사실 어린아이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예쁘기는 하지만... 보행기는 바닥에서 약간 떠있는 듯 했는데 애들이 전혀 어려움없이 잘 조정하고 있어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라온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 셋은 바로 이 아이들을 가리킴이 분명했다. 그런데 다시 고개를 드는 의문! 누구의 애들인가? 엄마는 폴라가 분명한데 애 아빠는 누구인가?
“우리의 아이들이에요.”
라온의 의문을 해명하듯 폴라가 손으로 자신과 라온을 번갈아 가리켰다. 하지만 1년 정도의 공백을 감안한다면 애들이 너무 성숙했다. 다만 애들이 여느 아이들보다 성장 속도와 언어구사력이 엄청 빨랐다면 라온의 아이들일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문제는 자기와 아무런 신체접촉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폴라가 성모처럼 혼자서 임신했을 리는 만무하지 않은가? 상상임신이라는 것이 있지만 그것은 말짱 헛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뭐란 말이냐? 이젠 더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의 회오리 속으로 빠져들려는 순간 폴라의 한마디가 현실에 부딪치도록 만들었다.
“얘들아 아빠 오셨다!”
이 말을 듣자마자 재빠른 동작으로 보행기에서 뛰어내린 아이들이 거리낌 없이 라온에게 달려들어 한 놈은 목덜미에 올라타고 두 녀석은 각각 양팔사이에 끼였다. 그러면서 다함께 말을 모는 시늉을 해댔다. 라온도 생각을 중지하고 한동안 애들과 즐겁게 놀았다. 그러는 가운데 마치 자기애들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후 모두 모여 저녁식사를 하고 나서 라온은 폴라와 애들의 배웅을 받으며 집으로 향했다. 폴라가 사놓은 집과 애들에 대한 궁금증이 전혀 해명되지 않았지만 폴라의 해명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어떻게 상황이 변하더라도 이젠 라온은 폴라를 떠나있을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폴라로부터 전화가 왔다. 헤어진 지 얼마되지 않았음에도 왜 그리 반가운지 몰랐다. 콩깍지가 씌어도 단단히 씐 모양이다. 이런 걸 누군간 이렇게 표현하기도 한다. 보고 있어도 그리운 사람이라고. 폴라는 먼저 자기를 믿느냐고 물었다. 라온이 당연히 그렇다고 답하자 내일 라온의 집으로 가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상의하겠다고 했다. 통화를 종료하면서 의심이나 궁금증은 차차 해소될 것이니 불안해하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했다. 폴라와의 통화를 시작하면서 라온은 이미 가슴이 확 트인 기분이었으므로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했다.
다음날 폴라가 라온의 집으로 왔다. 그녀는 라온과 마주 앉자마자 일년전 자기가 한 말에 대해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라온이 소중한 희망을 주었다고 했었다. 새로운 세계를 위한 방향, 그러한 세상에서 꽃피울 배우자와 후손들... 라온은 폴라가 그 말의 뜻을 풀이해주리라 잔뜩 기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라온의 두 손을 잡으며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 정도의 준비는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제소망은 라온님의 도움이 없이는 이루어질수 없어요. 지금부터는 제 곁에 계시면서 저를 보호해주시고 함께 새로운 세상으로 가도록해 주세요.”
해명은 없었지만 그녀의 간절함은 손의 촉감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급할 게 뭐가 있는가? 어쨌든 함께 있다 보면 그녀의 진심은 저절로 알게 될 것 아닌가.
“그래요. 능력은 없지만 제가 폴라님을 여신으로 그것도 그리스 신 제우스의 아내 헤라처럼 만들어드리겠습니다.”
라온은 밑도 끝도 없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밑천이 문제인가 말이다 하면서. 이틀 뒤 라온은 폴라가 마련한 집으로 이전하여 애들과 한 가족을 이루어 지내게 되었다. 부모님을 여의고난 뒤로 결혼할 마음도 없고 해서 혼자 고독한 생활을 하고 있던 라온에게는 참 오랜만에 맛보는 포근한 가정이었다. 여기에서 우선은 부부의 연이었다. 다만 폴라는 부부생활에 대해서는 백치 아다다 그 자체였다. 심지어 키스조차 할 줄 몰랐다. 이런 여인이 애를 낳았다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지 않겠는가. 그도 그랬지만 아주 재미있는 것이 있었다.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폴라는 수시로 홀로그램으로 방안을 가득 채웠다. 상당부분 우주와 연관된 광경이었고 가끔은 애들의 노는 모습도 나왔다. 그 백미는 한행성이 갑자기 폭발하는 것 이었는데 그때마다 폴라는 깊은 슬픔에 순간적으로 빠졌다가 즉시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오고는 했다.
그런 날은 잠이 들면 폴라를 처음 만나 집에서 삼일을 보낼 때 밤마다 경험했던 그 묘한 느낌이 일곤 했다. 그녀가 그렇게 보여주는 홀로그램을 처음 접했을 때는 그녀가 그런 첨단기기를 사용한다는 것에 그저 놀랍기만 했었다. 그런데 몇 번 보다보니 뒤늦게나마 이런 의문이 들었다. 현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이러한 홀로그램이 실용화되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없었던 것 같았다. 일본에서 스크린이 필요 없고 손으로 만질수도있는 3D 공중 플라즈마 디스플레이 기술이 개발되었다는 기사는 읽어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 수준이 폴라가 시연하는 것에 비하면 반도 따라오지 못할 것임이 분명했다. 그 정도로 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만지지 않아도 만지는 것 이상의 감촉이 느껴지니 말이다. 긍금증이 폭증하자 폴라에게 묻지 않을 수없었다. 폴라는 빙그레 웃으며 아빠가 만들어 주었다는 말과 함께 표정이 침울해졌다. 아빠에게는 슬픈 추억이 있다면서. 라온은 공연히 물어보았다 싶었는데 다행히 평정심을 되찾은 폴라가 홀로그램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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