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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스토리

몽풍삼매(夢風三梅) (제9회)

by 허슬똑띠 2022.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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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주 전동차

 

김중훈과 마고도에 대한 기억을 접고난 후에도 기온은 오전 내내 거처에서 기다렸다. 한데 좀이 쑤셔 견딜 수가 없었다. 만약에 대비한 물건들을 가방에 담고 샤워를 하고난 후 모처럼 푸짐한 식사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밖으로 나왔다. 식당에 들러 든든하게 먹고 나서 사람들의 왕래가 제법 많은 거리를 여유롭게 걸었다. 예전에 그는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평범한 삶을 산다는 것이 전혀 어려운 것은 아닐 진데 그런 축의 한자리를 점하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가 매우 가련하게 느껴지곤 했었다. 더구나 즐겁게 떠들며 지나가는 같은 또래들의 행복에 겨운 모습은 부아를 돋우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그들과 전혀 다른 아주 독특한 세계에 입성한 자신이 오히려 뿌듯했다. 여유 있지만 그렇다고 느릿하지 않은 상쾌한 발걸음으로 주변을 둘러보면서 가던 그는 갑자기 뒤통수가 근질근질해짐을 느꼈다. 평온한 산책을 방해하는 자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경고였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변함없는 걸음걸이로 계속 전진해 가다가 코너를 돌자마자 후다닥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사람들이 몰려들어왔다. 그 틈에 몸을 숨기고 밖을 바라보니 승용차 한 대가 느리게 코너를 돌아오다가 주저주저했다. 그러다가 뒤에서 따라오던 차들이 빵빵대자 그대로 지나갔다. 그가 계속 불안하게 느껴왔던 것이 단순한 걱정이 아님을 보여주는 상황이었다.

가온은 건물 화장실에 들어가 가발과 턱수염으로 변장하고 리버시블(Reversible) 형태의 옷을 뒤집어 입으면서 머리를 굴려 갖가지 추측을 해보았다. 그들은 제이슨이 애기했던 음모를 꾸미고 있는 그자들이 아닐까? 하지만 그들이 자신의 정체를 파악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런데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바에서 만났던 그 신사가 다름 아닌 고도엠이었다는 사실이다. 바에서부터 자신을 추적해온 것이 분명했다. 거처가 그에게 이미 알려졌을 가능성이 많았다. 그런데 왜 들이닥치지 않고 계속 미행하고 있을까? 확실한 꼬투리를 잡기 위해서일까? 그렇다면 여기서 그의 추적을 따돌리고 완벽하게 사라지는 수밖에 없다. 가온은 조심스럽게 화장실을 나왔다. 그 때 서경위는 미행하던 차에서 내려 그 건물로 급히 가서 구조를 살폈다. 출입구가 하나였다. 그녀는 다음 건물의 편의점에 들어가서 길을 내다보며 기다렸다. 그가 추적을 피하기 위해 변장을 하고 나올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들 일당들은 갖가지 기기들을 구비하고 있으며 무술이나 변장술에도 뛰어나다는 말을 마경감으로부터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체격이라든가 얼굴의 특징을 잘 익혀두었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변장하더라도 알아볼 자신이 있었다. 가온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므로 그를 미행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변장한 가온은 전혀 두리번거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건물을 나섰다. 택시를 탈까 하다가 추적자들의 감시를 완전히 따돌릴 때까지 걷기로 했다. 그리고 추격권에서 벗어난 것으로 확인이 되면 모텔에 자리 잡고 제이슨의 연락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는 편의점을 지나치다가 가게 안을 곁눈으로 들여다보았다. 눈에 띠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물건을 구입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서 음료수를 마시고 있는, 캐주얼 복장을 한 여성이었다. 꽤 멋지고 싱그러운 인상을 풍겼는데 곧바로 옆으로 돌아서는 바람에 자세히는 볼 수 없었다. 깜찍했던 그 아이도 컸으면 저 정도보다 더 예쁜 숙녀로 성장했을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걸음을 재촉했다. 걷다보니 광고판에 쓰여 있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한편의 영화처럼, 여행처럼 인생을 즐겨라’ 어차피 내 인생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고 또한 쫒기는 이 순간도 위험한 여행의 한 순간일 텐데 그래 까짓 것 즐겨보자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여유롭게 대처하기로 했다. 미행자의 여부를 다시 점검해 보기 위해 휴대폰을 거울삼아 뒤를 살펴보았다. 순간 아연 긴장했다. 추적자를 발견한 것이다. 편의점에서 보았던 여인이었다. 그녀가 우연히 아니었음을 느꼈다.

걸으며 계속 살펴보는데 그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의심스러운 동작은 전혀 보이지 않으면서 따라오고 있었다.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며 쫒아오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아까 미행하던 사람이라면 과연 자신이 변장한 모습을 알아차릴 수 있었을까 라는 의문이 들자 자신을 알아보고 추격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나 그의 느낌을 무시하기는 그랬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휴대폰의 진동이 느껴졌다. 제이슨이었다. 그는 차분하지만 긴장감이 깃든 목소리로 지금부터의 행동방향에 대해 말했다. 그가 말한 그들의 행동개시 시간으로부터 30분 정도 남아있었다.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그 시각에 맞추어 그 자리에 가서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추측에 의해 대비하는 것이고 아직도 무슨 일이 벌어질 지에 대해서는 제이슨도 확신하지 못했다. 가온은 더 이상 추적자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길을 건너가서 급히 택시를 잡아탔다. 출발하는 택시에서 바라보니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불안감이 전신을 훑어 내렸다.

가온이 지하철 2호선 어느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정사복경찰관들이 지하철 내부로 진입하고 있었다. 제이슨의 통지를 받은 경찰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전 역을 경비하려는 것이리라.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하면서 무턱대고 전동차의 운행을 중단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기도 할 것이다. 그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화장실에서 변장도구를 벗어 가방에 넣은 가온은 승강장으로 내려왔다. 탑승구 앞에서 전동차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나서 승강장 양편에 도열하는 기동경찰들을 불안한 눈초리로 지켜보았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제이슨이 범인들이 범행을 감행하리라 판단한 전동차가 도착하려면 5분 정도 남았다. 그는 커피자판기에서 커피를 빼어들고 그 옆에 섰다. 커피를 홀짝거리다가 아무 생각 없이 마치 습관과도 같이 행해진 이런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놀랐다. 생각해보니 이른 점심을 먹었던 것도 그랬다. 오늘 내내 안정되지 못한 마음이 뜻하지 않은 행동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괜히 민망해져 쩝쩝대다가 상쾌한 멜로디에 이어 전동차가 진입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오자 커피를 마저 마시고 시간을 다시 확인했다. 바로 그 열차였다. 그는 탑승구 앞에 섰다. 이때 서경위가 승강장 입구의 계단을 내려서고 있었다. 그녀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가온을 확인하고 전동차가 정차할 때까지 계단 쪽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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