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던트 실종사건
1. 프롤로그
198X년 초여름.
회색빛의 구름들이 높게 드문드문 창공을 수놓고 있는 가운데 시선 접근을 막고 있던 태양의 둥근 자태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와 함께 뜨거운 빛의 힘이 대부분 사그라들면서 불그스레한 기운만 점차 강해져 가는 가운데 더위에 지친 듯한 무성한 잎새들을 드리우고 있는 나무들 사이로 우중충한 건물들이 보였다. 서울 모 대학의 의대부속병원 병동들인데 붉은 벽돌의 벽채 사이사이로 틀어박힌 창문들이 석양의 햇빛을 받아 분홍빛 보석과도 같이 반짝거렸다. 병원의 건물을 들러싸고 있는 나무들은 가끔 약하게 바람이 불어 올 적마다 더위를 털어 내듯 넓적한 이파리를 흔들어 대고 있었다. 드문드문 늘어서 있는 벤치에는 정원의 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우고는 있으나 아직도 남아있는 열기 때문인지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아랑곳하지 않고 환자복 팔소매를 걷어 제친 한 남자가 벤치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는데, 그의 옆에는 링거병을 매단 거치대가 멀뚱히 서서 그 남자가 움직이는 대로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신문을 양편으로 활짝 펼쳐들고 거의 코를 박은 채 한쪽 면의 기사를 읽고 있었다. 남자의 머리가 만들어 내는 그늘 속에서 실종기사가 살며시 드러났다.
'한강대 부속병원 레지던트 김병성씨 실종! 일주일 전 병원에서 늦는다고 집에 연락한 뒤로 현재까지 감감무소식이라는 가족의 신고를 받고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그 남자로부터 10여 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다른 벤치. 점퍼차림의 남자와 간호사 복장을 한 여인이 나란히 앉아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점퍼차림의 남자는 한 손에는 수첩을 들고 있으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중고 등학생들이 하는 것처럼 연신 볼펜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무뚝뚝하면서도 능글맞은 구석이 엿보였다.
"조용희씨가 김병성씨와 만난 지는 얼마나 되었나요?“
여인은 그 남자의 표정을 살피듯 하면서 질문에 답했다.
"한 6개월쯤 되었어요. 대학 선배 언니가 그 병원에서 근무하는데 그 언니소개로 사귀게 되었어요."
"혹시 최근에 김병성씨와 다투거나 한 일은 없었나요?"
"그 사람은 저를 무척 아껴주었어요. 사실 저는 그 사람이 나를 만나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었죠. 그런데 무슨 갈등이 있을 수 있겠어요."
"그렇다면 실종 바로 전 쯤해서 뭔가 특이한 느낌을 받지 못했나요?"
"전혀 없었어요. 그 사람은 무슨 일이 있으면 내게 모두 얘기 해주거든요."
"갑자기 휴가는 왜 내신 겁니까?"
"그 때 몸이 좋지 않았어요. 초여름 감기몸살이었던 것 같아요"
"병원에서 치료받으면 될 텐데?"
"몸이 많이 약해진 것 같아서 휴가기간 몸 좀 추스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요. 또 그 사람한테 걱정을 주고 싶지도 않았구요."
"그럼 휴가 때는 내내 집에만 있었나요?"
"예, 모처럼 쉬는 거 제대로 쉬자고 마음먹고 책만 읽고 지냈어요."
그러면서 목이 멘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집에 있는 사이 연락 한번 주지 않았어요. 보고 싶기도 해서 전활 해볼까 하다가 걱정만 끼칠 것 같아서 그만 두었는데…… 그리고 나서도 얼마나 서운했는지 아세요? "
그녀는 얼굴을 숙여 두 손에 파묻었다. 그러한 그녀를 보면서 남자는 다소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한테…… 이제 알고 보니 무슨 일이 있어서 그랬던 거더라구요."
그녀는 다시 얼굴을 드는데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있었다.
"그 때는 무척 너무 섭섭했었는데……이제는 나쁜 일이 생기지는 않았을까 걱정되네요."
그녀는 형사를 바라보며 울먹였다.
"형사님! 제발 그분 좀 빨리 찾아주세요!"
중얼거리듯 흘러나오는 습기어린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점퍼는 볼펜을 입에 물면서 수첩을 덮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거야 원, 혹 떼려다가 혹 붙이는 격이네. 사실 집을 다 수색해 봤지만 털끝 하나 나타나는 게 없으니……."
잠시 후 병원 건물 내부의 휴게실 한편에서 그 형사가 다른 간호사를 붙잡고 무언가 질문을 하고 있었다. 햇빛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땅거미가 몰려들 무렵 형사가 감사표시를 하면서 일어섰다. 간호사가 간호사실로 향해 가자 그도 곧바로 병원 문을 나서는데 이제는 오히려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햇살이 병원건물에 상큼하게 비추고 있었다. 아침이지만 환자와 보호자 그리고 간호사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이때 조용희가 병원문을 열고 들어왔다. 주변은 전혀 아랑곳 하지 않은 채 곧바로 이층으로 올라간 그녀는 복도를 가로 질러 간호과장실로 갔다. 간호복이 아닌 일반 복장을 하고 있는 그녀는 어깨에 작은 백을 메고 있었다. 과장실로 들어간 그녀를 과장이 왠일이냐는 듯 힐끗 바라보았다. 조용희는 백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어 과장에게 내밀었다. 과장이 봉투를 바라보더니 '사직서?'라고 하면서 다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번 일로 많이 힘들었나 보네?"
"예, 형사들이 자꾸 들락거려 일하는 데도 방해가 되고……또 다른 직원들이 바라보는 시선도 곱지 않고 해서요."
"그것도 그렇고 사귀던 사람이 갑작스레 행방불명되었으니 마음이 많이 괴로웠겠지. 그런데다 제일의 혐의자로 몰렸으니 더 그러겠지. 그래요 알았어요. 당분간 몸조신하는 것도 필요할 거야."
그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사를 하고 나가는 조용희를 배웅한 뒤 돌아와서 자리에 앉는 그녀는 '의사와 사귄다고 까불더니만…'이라고 중얼거리며 다소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점차 강열해지고 있는 햇살 속에서 시내 중심가의 한 정류장에 도착한 버스에서 조용희가 내렸다. 손으로 햇빛을 가리며 좌우로 둘레둘레 건물들을 살펴보던 그녀가 자기가 찾던 곳을 발견한 듯 성큼성큼 다가간 건물 속으로 사라졌다. 그 건물 귀퉁이에 세로로 '종로 경리학원'이라는 간판이 붙어있었다.
정적에 싸여있는 실내에는 사르르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불이 꺼져 있는 거실에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조용희의 하얀 얼굴이 유리창에 그대로 반사되어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나 누가 보았다면 아마 미인유령을 마주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잠시 그렇게 서 있다가 깊은 어둠의 까만빛을 그대로 가슴에 담은 듯이 무표정하게 식탁으로 다가왔다. 둥근 불빛이 비추고 있는 한 편으로는 핸드백과 경리관련 서적들이 놓여 있었다. 핸드백 속에 끼어 있던 신문을 꺼내며 의자에 앉은 그녀는 신문을 펼쳐들었다. 신문 한 면의 중간에 큰 활자로 씌여진 '김병성씨 실종 사건, 결국 미제 사건으로 남다'라는 문구가 확 눈에 띄는데 조용희는 거기에 오랫동안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참고) PHYTORAID는 Phyto와 Raid의 합성어(스토리의 상징성을 위해 임의로 만든 글자임)로서 Phyto는 식물(Plant)을 의미하고 Raid는 습격이라는 뜻이다. 즉 ‘식물의 공격’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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