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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스토리

파이토레이드(PHYTORAID) (제5회)

by 허슬똑띠 2022.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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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의 꽃가루솜털

 

6. 황무지

200X년 10월.

가볍게 일렁이는 짙푸른 바다가 멀리 보이고 수평선 주위에는 낮게 먹구름들이 깔려있다. 수면 위로는 갈매기들이 오르내리며 춤추듯 날고 있고 바로 앞편에 보이는 바닷가에는 거친 바위에 부딪쳐 포말이 일고 있다. 바닷가에서 육지로 눈길을 돌리면 형형색색으로 물들어 가는 산과 황금빛의 들녘이 마음을 푸근하게 하는 정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런데 멀리 앞쪽으로 온통 짙은 회색의 희뿌연 가루들로 뒤덮여 있는 벌판이 나타난다. 곧이어 똑 같은 형태의 산과 둔덕들이 이어지면서 마치 화산이 폭발하고 난 뒤 화산재가 쌓여 있는 듯이 보인다.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는 정상적인 대지와 경계를 이루는 곳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기다란 철제 파이프가 세워져 있고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한 팻말들이 드문드문 붙어 있는 철조망이 악보의 5선지처럼 끝임 없이 이어지고 있다. 멀리 한 쪽에 불에 그을린 간판 하나가 갸우뚱하게 땅에 박혀있는 모습이 보인다. 일부 검댕이가 지워져서 겨우 드러나 알아볼 정도로 '엠그룹 파이토 엔지니어링 제 2 연구소'라고 쓰인 글씨가 나타난다.

갑자기 습기가 가득한 바람이 불면서 주위가 어둑해지도록 먹구름이 기세 좋게 뭉쳤다. 그 먹구름이 몰려오면서 굵은 소나기가 노드리듯 퍼붓기 시작했다. 소나기가 떨어지는 곳은 마치 기관총 세례를 받는 것처럼 희뿌연 먼지가 풀썩거리며 솟구쳤다가 주저앉고는 했다. 소나기와 함께 거세게 몰아치는 바람은 먼지가 주저앉기도 전에 사방으로 흩뿌려 갔다. 온통 흙먼지가 사위를 도배하는 가운데 굵은 빗방울이 계속 그 사이사이로 꽂아 들이쳤다. 하늘 한 편에서 번쩍하더니 '우르르 쾅'하는 천둥소리가 귀가 먹먹하도록 울렸다. 그렇게 한참 동안을 번쩍거리는 번개와 함께 천둥소리가 하늘을 찢어 놓을 듯 울려댔다.

주위가 다소 밝아 오면서 소나기가 조금씩 잦아들자 번개도 사라지고 천둥소리도 점차 희미해져 갔다. 아직 검은 티를 벗지 않은 구름들의 움직임이 둔해지면서 빗줄기가 완연히 약해졌다. 어둑한 기운이 밀려 나면서 멀리 마른 잡초 하나 없는 흙더미 가운데에 무언가가 솟아 있는 것이 보였다. 계속되는 거센 바람으로 먼지 커튼이 펼쳐졌다 접히는 동작이 계속되는 가운데 서서히 확대되어 나타나는 것은 상당히 키가 큰 나무였이. 마치 장식용 트리 모양을 하고 있는데 줄기와 가지는 물론이고 가지들에 드문드문 나 있는 이파리들 모두 온통 검푸르고 윤기 나는 미늘과 같은 것으로 뒤덮여 있다. 그 모양새가 마치 갑옷에 매달려 있는 금속조각처럼 보인다. 몸통은 물론이고 가지나 이파리조차 세차게 불어 는 바람에도 거의 흔들리지 않는다.

비가 완전히 그치고 바람도 조금씩 약해졌다. 그러자 가지와 이파리 사이에서 하얀 솜털 같은 것이 스멀스멀 나타나기 시작했다. 겉에는 수북하게 길고 흰 깃털이 달려있고 그 안쪽으로는 뭉치솜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일반 풍매화의 꽃가루솜털보다 몇 배는 더 커 보이고 색깔도 매우 희었다.

어느새 주위는 희미한 어둠이 번지고 있었다. 꽃가루솜털들이 하나 둘씩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공중으로 풍매화의 꽃가루솜털처럼 날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이내 수도 없이 흩날려 가는데 옅은 검은 빛 허공 속에서 희끗희끗 그 모습들이 보였다 없어졌다 를 반복했다.

7. P시 소재 종합병원

201X년 4월 현 시점.

햇빛이 따사롭게 비치면서 바람도 훈훈해지자 환자들이 많이 나와 산책하고 있었다. 봄날의 늦은 햇살이 비치는 정원 한편에는 자산홍과 철쭉꽃이 붉은 빛과 흰색으로 수놓아져 피어있었다. 제법 덩치가 있는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고 있는 정원의 주변에는 흰색 벤치가 몇 개 놓여있는데 대부분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약간씩 들떠 있었다. 그 중 아주 후미진 곳에 위치한 벤치에 앉아 있는, 의사복장의 30대 중반 남자와 그와 비슷한 연령의 양복 입은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간만에 만난 친구처럼 안부인사가 끝나자마자 양복을 입은 남자가 누런 서류 봉투에서 몇 장의 종이를 꺼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음 주에 회의가 있어 자료를 취합하고 있는데……"

그러면서 종이를 힐끗 들여다 본 다음 의사를 바라보았다.

"아귀가 잘 안 맞는 통계가 나오더란 말이야. 그래서 부랴부랴 그 전 거까지 들춰보니까, 이거야 원."

그가 의사에게 종이를 건넸다.

"이거 봐! 올해 들어 6개월간 신생아의 출산이 하나도 없는 동네가 10군데가 넘는다니까. 그래 아무리 봐도 이상해서 너한테 전화한 거지. 실제로 여기 병원 상황은 어떤가 하고."

의사가 남자가 건네준 종이를 들여다보며 대꾸했다.

"그 지역 보건 지소에는?"

"일일이 전화해봤지. 그런데 전혀 깡통이야."

"네 전화 받고 나서 산부인과 동기하고 한참 동안 얘기 했어. 그런데 네 말마따나 충격적이야."

"정말? 어느 정돈데?"

"근래 들어 불임 상담하는 부인들이 엄청 늘어났다는 거야. 당연지사 급격한 신생아 감소로 이어지고, 희한한 도미노 현상이지."

"도미노 현상이라?"

"신생아감소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어. 유산 건이 말도 못하게 늘어났다는 거야."

그 말을 들은 남자의 눈이 똥그레졌다.

"유산?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데?"

"한 5~6개월 정도 그랬다는데, 그 동안은 별로 주목하지 않았었다는구만. 특별한 이유는 아직 모르고."

"불임과 유산이 급증했다? 혹시 지역별로는 어떤지 얘기 나온 거 있어?"

의사가 다시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이 자료를 보니 엇비슷한 통계가 나와 있는데 실제로 신생아 출생이 전혀 없는 지역도 있긴 있었나봐."

"잠깐! 혹시 이런 것은 아닐까? 뭣 때문인지는 몰라도 다른 곳에서 애 낳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거나……."

"뭐, 다른 곳에 가서 아일 낳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 모든 임산부가 다 그럴 수는 없는 거잖아?"

"그건 그래……."

"그리고 신생아가 하나도 없는 곳이 유산율이 가장 높다고 하니까, 일단은 유산문제로 되돌아가는 셈이야."

"외견상으로 보자면……당장 원인은 알 수 없지만……급격한 유산이 신생아 격감의 주된 원인고만."

"현재로서는 그렇다고 봐야지. 그래 산부인과에서는 지금 난리도 아닌 모양이야."

그러면서 의사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럴 만도 하지 않겠어? 잘못하면 산부인과가 없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 오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말이야!"

"정말 그러기도 하겠네!"

"물론 농담이지만, 이거 정말 뭐가 잘못 돼도 한참 잘못 된 거 같아."

대꾸 대신 양복 남자가 손가락으로 봉투를 톡톡 쳤다.

"여하튼 시집장가를 늦게 가네, 출산을 기피 하네 한다고는 하지만, 글쎄, 이걸 보면 그게 다가 아닌 거 같아."

"그래! 그런데 내가 산부인과 전문의는 아니지만 생각할수록 이해가 안가. 세상에 그래도, 한 동네에서 6개월 동안 아이가 하나도 없었다니, 이건 말도 안 되잖아? 여기가 벽촌도 아니고 말이야."

그러면서 의사가 손바닥에 숫자를 써가며 얘기했다.

"우리 시 인구가 30만 정도 아냐? 그렇다면 아주 단순하게 따진다고 해도 20세 이상 인구가 60%는 될 거고, 이중 절반이 임신을 할 수 있는 여성이라 본다면 최소한 9만 명이라는 얘긴데 말이야!"

그 말을 이어받아 양복이 보충했다.

"그렇지! 그리고 보수적으로 봐서 그 중 10%만 출산을 한다고 해도, 9천 명 정도의 애기가 세상에 나와야 된다는 거지. 그런데 거의 1년간 그 절반 정도도 안 되었으니."

그 말이 끝나자마자 시계를 들여다 본 의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만 들어가 봐야겠다."

그러자 양복 남자도 같이 일어서면서 부탁했다.

"당분간 병원의 실태를 좀 더 알아 봐줘! 나도 인근 시의 보건소까지 살펴볼 거니까."

"알았어! 그런데 저게 뭐지?"

의사가 가리키는 곳은 멀리 노을빛에 금빛으로 물들어 가는 능선을 수놓고 있는 나무들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나무들 위로 커다랗고 하얀 민들레 솜털과도 같은 물체들이 날려 오는데 노을빛에 분홍색으로 물들어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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