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연한 자금의 행방 그리고 추적
9. 나 어떻게
은행지점의 출입문을 벌컥 열고 급하게 들어서는 고백종의 얼굴에는 여전히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노란 색 어깨띠를 두른 남자직원 한 명이 그를 반기지만 본채만 채 하고 잰걸음으로 급하게 차장 명패가 얹혀 있는 책상으로 갔다. 머리가 희끗희끗하긴 하였으나 얼굴이 반질반질한 40대 초반의 남자가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어이구 고차장님께서 왠 행차십니까?"
고백종은 대강 악수를 하고 어정쩡하게 말을 꺼냈다.
"아 예, 뭔가, 이상한 게 있어서, 좀 알아보려고 왔는데요."
그러자 차장이 눈치를 채고 VIP실 쪽으로 안내해 들어갔다. 'VIP ROOM'이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는 방으로 들어가면서 차장이 카운터 뒤편에서 서류를 정리하고 있던 여직원을 바라보며 손을 까딱하자 그 여직원은 곧바로 그들을 쫓아 쪼르르 들어오더니 원하는 차 종류를 물었다. 고백종이 대답 대신 통장 하나를 건네주며 정리를 부탁했다. 여직원이 나가자마자 고백종은 한 숨을 푹 쉬었다. 은행 차장은 그의 표정을 살피며 조용히 기다렸다. 다시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던 고백종이 어이없어 하는 표정으로 겨우 말을 꺼냈다.
"방금 확인 해봤는데, 오전 중에 이체한 자금이 전혀 엉뚱한 곳으로 갔더라구요.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네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고차장님께서 계좌를 잘못 쓰신 게 아닌지……."
그러자 말도 안 된다는 듯 고백종이 손사래를 쳤다.
"절대로 그럴 리 없어요!"
마침 차를 가지고 들어오던 여직원이 높은 톤의 목소리에 놀라 움찔하면서 멈췄다. 그런 여직원의 모습을 보자 겸연쩍어 하면서 말소리를 낮췄다.
"일단 다시 한번 확인 좀 해주시겠어요?"
완연히 기가 꺾인 표정과 함께 메모지 한 장을 내밀었다.
"송금될 곳은 이 번홉니다."
차장이 메모지를 받아들더니 잠깐만 기다리라 하면서 밖으로 나갔다. 고백종은 여직원이 가지고 온 차를 마시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연신 뭐라고 혼자 씨부렁거렸다. 고백종이 똥줄이 탄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은행차장은 한참이 지나서야 메모지를 다시 가지고 들어 왔다. 그러면서 고백종을 바라보며 갸우뚱거렸다.
"이거 이체된 계좌번호가 완전히 다른데요."
고백종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이 되어 놀라 되물었다.
"정말요! 아니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차장님도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바보라지만 완전히 다른 계좌를 적을 리가 있겠어요?"
"글쎄요? 저도 그렇게 생각은 합니다만……혹시? 고차장께서 계좌번호 입력할 때 다른 번호를 착각해서 입력시킨 건 아닐까요?"
"착각요? 아뇨! 절대로 아닙니다. 도리어 인터넷 뱅킹시스템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닌가 싶은데요."
은행차장이 쓴 웃음을 지었다.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아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으니 그러죠. 그렇다면, 잘못 이체된 곳으로 반환요청해서 받아 내는 데는 문제가 없나요?"
"제가 확인해서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차장님! 이건 때문에 내 목이 날아가면 차장님께서 해주신 신용대출도 문제가 생긴단 말입니다."
"그럴 일이야 있겠습니까? 상대방도 확실하게 잘못 들어온 돈이다 라는 걸 알면서 잡아뗄 수 없지요."
고백종이 일어서면서 다시 당부를 했다.
"어째든 누구의 잘못도 없이 이런 일이 벌어진 것만은 사실입니다. 사무실에 가서 우리 나름대로 다시 한번 점검해볼테니 빨리 회수조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바로 연락 좀 주세요."
"네 그러죠. 지금 곧바로 알아보고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무실로 돌아왔지만 일이 손에 잡힐 리가 없는 고백종이다.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았다가 의자를 돌려서 창밖을 보았다가 하면서 좌불안석이었다. 업친 데 덥친 데라고 자금을 보낼 곳에서도 연신 전화가 와서 왜 자금이체가 이리 늦느냐며 그를 닦달 해 댔다. 그 이후 은행 차장으로부터 전화가 오기까지 마치 정전협정이 된 것처럼 고백종을 건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사무실에는 컴퓨터 자판기 두들기는 소리, 프린터 작동소리, 직원이 통화하는 소리, 간간히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하루를 마무리하느라 분주한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고백종 책상 위의 전화벨이 울리자 누구의 전화인지를 직감한 그가 얘기 하고 있던 직원에게 가보라고 손짓하며 전화기를 들었다.
"예! 자금부 고차장입니다."
"고차장님이시죠? 저 황시백입니다."
"아 네! 그렇지 않아도 목 빠지게 전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회수에 별 문제 없습니까?"
잠시 상대편의 목소리가 머뭇거렸다.
"그런데 그게……. "
순간 고백종은 숨이 넘어갈 듯이 다급하게 물었다.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먼저 돈이 입금된 그쪽 은행사람에게 부탁을 해서 계좌를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그 계좌는 대포라고 하더라구요."
"뭐! 뭐라고요? 대포계좌라고요?"
"그런데 입금 즉시 5개 금융기관으로 이체되었답니다. 그 계좌도 모두 대포랍니다. 거기에서도 이체 즉시 모두 현금으로 인출되었다는 겁니다."
고백종의 얼굴은 황당하다 못해 얼빠진 표정으로 변했다.
"아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떻게……."
"은행 에이티엠(ATM)기에 찍힌 사람들이 제각각 이라는데 모두 신원확인이 불가능하답니다."
"그렇다면 회수는 물 건너갔다?"
고백종은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신음소리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한동안 통화가 끊어진 전화기를 잡고 그렇게 멍하니 있었다. 계속 솟아 나오는 땀을 주체하지 못하는 고백종이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제기 세상 믿을 놈 하나도 없구만' 이라 중얼거리더니 자포자기라도 한 것처럼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댔다. 잠시 그렇게 있던 그가 갑자기 의자에서 튕기듯 일어섰다. 다시 상의를 걸쳐 입고 나가면서 중얼댔다.
'그래 이 방법뿐이다. 삼촌한테 가서 부탁하는 수밖에…….'
모 경찰서 수사과장실. 책상에 앉아서 과장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보고서들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노크도 없이 왈칵 출입문이 열리며 고백종이 들어 왔다. 급작스런 침입에도 전혀 놀라는 빛없이, 그를 한번 힐끗 쳐다보고는 계속 보고서를 들여다보던 과장은 고백종이 응접소파 쪽으로 가면서 투덜거리자 그제야 보고서를 내려놓고 책상 앞에 놓여 있는 소파로 왔다.
"어서 와라! 무슨 일이길 레 전화로 그리 호들갑이냐?"
고백종이 울상이 되어 자리에 앉았다.
"삼촌, 저 큰일 났습니다. 잘못하면 횡령죄로 고발당하겠습니다."
"횡령죄? 이제 보니 너… 관리하던 자금 빼내어 주식투자 했나 보구나?"
"아니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그게 아니고요, 전무님 지시를 받고 관리하던 계좌에서 1억2천만 원을 이체했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된 노릇인지 엉뚱한 계좌로 가버린 거예요."
과장이 고백종을 빤히 바라보며, 전혀 일같이 않은 일로 생난리를 치는 게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그 계좌주인에게 돌려받으면 될 것 아냐?"
"저도 그러면 될 줄 알았지요. 그런데 이체된 계좌가 대포통장이고, 그리고 모두 오전 중에 다른 대포계좌로 다 이체되어 출금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그렇다면 뭔가 냄새가 나는데? 그런데 너 정말 네가 꾸민 일은 아니겠지?"
"아니?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것두 유분수지, 삼촌마저 그러시면 전 어떻게 합니까?"
"분명 제대로 계좌번호를 기입했는데 전혀 엉뚱한 계좌로 흘러 들어갔다? 은행에서는 뭐래?"
고백종이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은행에서는 정상적으로 자금이 이체되었으니 자기들은 전혀 책임 없다고만 하니……. 그러니 지금 제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도깨비에 홀린 기분이라니까요!"
과장은 황당해 하면서도 열 받아 있는 고백종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며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잠시 생각에 잠겨 턱을 쓰다듬었다.
"그럼 일단 네 얘기가 사실이라 치고… 흠… 그러면 혹시 해킹이나 피싱같은 건가? 아무래도 사이버범죄 수사대에 수사 의뢰해서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이 말에 고백종이 망설이자 과장이 왜 그러냐는 듯이 바라봤다.
"근데… 곤란한 문제가 있어요. 이건 우리 회사 비자금… 이거든요. 그래서 공식적인 수사의뢰가 곤란해요."
"비자금? 그럼 나보고 직접 수사해달고 하는 거냐?"
과장이 황당해 하며 반문하자 고백종이 면목 없어 하면서도 진지한 표정으로 사정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삼촌정도 직위라면 뭐, 부하들에게 살짝 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과장이 어이없다는 듯 손을 이마에 올렸다.
"으이구……."
"그렇지 않으면 회사에서는 저를 의심할 거란 말입니다.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삼촌……."
그러면서 다시 울상을 짓는 고백종을 측은하게 바라보던 과장이 고민하더니 결론을 지었다.
"음, 어쩔 수 없구만. 상세한 자료를 가져와 봐! 친구한테 따로 부탁하는 수밖에 없겠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삼촌!"
고백종은 살았다는 듯 재빨리 방을 뛰쳐나갔다. 과장은 이런 조카를 멍하니 바라보다 혀를 차며 다시 책상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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