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먼 우드뱅크 박사
12. 한가람 기자와 사이먼 우드뱅크
한누리 신문사의 한가람기자는 미국 엘에이 특파원 생활을 마치고지난 올해 2월에 귀국하였다. 돌아오자 마자 새로운 업무에 적응하느라 정신 없이 2개월을 보내야 했다. 이제 대강 자리를 잡자 지금까지 미뤄두었던 일들을 본격적으로 알아보기로 했다. 부장에게 그가 조사를 하고자 하는 일들에 대한 내용을 보고하고 난 뒤, 출발하기 전에 자료를 점검하기 위해 별도로 보관해두고 있었던 파일을 펼쳐들었다. 틈틈히 모아두었던 자료와 함께 넣어 두었던 사진 몇 장을 꺼내들었다. 첫 번째 사진은 꽤 높아 보이는 제법 몸통이 굵직한 나무인데 고무나무 잎만큼이나 널찍한 잎새들이 무성하게 달려 있었다. 그 사이사이로 반짝이는 금속열매가 맺혀있는 것이 보였다. 그 아래에는 사인펜으로 '젬트리(GEM Tree)'라고 쓰여있었다. 한기자가 다른 사진을 들어 보이자 화산재가 쌓인 듯한 황폐한 언덕과 벌판이 끝없이 펼쳐진 장면이 나타났다. 역시 아래 쪽에는 '젬트리 괴물의 파괴된 현장'이라는 글자가 쓰여있었다. 그 모습에 이어서 흰색 가운 연구원 복장의 훤칠한 동양인 남자 모습이 나타났다. 마찬가지로 사진 아래 편에 '사이먼 우드뱅크'라고 쓰여져 있었다.
그는 신문사 주차장에서 차를 몰고 나와 사이먼박사가 근무했었던 엠그룹의 파이토엔지니어링 연구소로 향했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제일 먼저, 엘에이 특파원으로 있을 당시 신문사 특집기사 취재차 만났었던 사이먼 우드뱅크박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파악해 보고자 했었다. 그는 자신보다 1년 전쯤 먼저 귀국했었던 사이먼박사의 행방불명 소식을 듣고 매우 놀랐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었고 그 이면에는 분명 감추어진 비밀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K시로 향하는 차안에서 그는 사이먼박사를 만났들 때를 떠올렸다.
2년 전 뜨거운 햇살이 쏟아지는 엘에이 거리 풍경이 한기자의 머릿 속을 가득 채웠다.
본사로부터 창립특집기사를 위해 미국의 유명한 환경공학자들을 인터뷰한 기사를 보내라는 지시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그런데 그가 취재했던 어느 미국인 과학자가 '사이먼 우드뱅크'박사라는 사람을 소개하면서 좋은 이야기가 많이 나올거라고 했었다. 그러나 한기자가 본사로부터 인터뷰 대상자로 통보받은 사람의 명단에는 없었던 인물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한기자는, 사이먼박사를 소개해준 과학자가 미국내에서도 명성이 있는 사람이란 점을 감안하여 사이먼 박사를 특별 취재대상자로 선정하기로 했다. 그래서 여러 경로를 통해 '사이먼'이라는 존재에 대해 알아보았다. 뜻밖에도 그는 한국계 환경식물공학자였다. 식물학을 전공했지만 특이하게도 환경정화와 관련한 연구부문에서 매우 특이한 존재로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본사에 이러한 사실을 통지하고 그에 대한 취재도 승인을 받았다. 그 즉시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처음에는 다소 난감한 듯이 대답하던 그는 인터뷰를 요청한 사람이 한국인 기자라는 것을 감안하여 결국 인터뷰를 승락했다. 평상시에도 사이먼박사는 매우 분주한 듯이 여겨졌다. 사이먼은 자신의 일정을 확인한 다음 이틀 후에 연락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그래서 한기자는 약속한 날짜에 그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한기자는 여직원이 컴퓨터에 매달려서 취재해온 기사 내용들을 열심히 정리하고 있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무심하게 창밖에 펼쳐지는 도시의 정경으로 눈을 돌렸다. 잠깐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순간 전화벨이 다소곳이 울렸다. 그는 움찔거리다 전화기를 들었다. 사이먼박사였다.
"한기자님이시지요? 안녕하십니까? 사이먼 우드뱅크입니다."
한기자는 반갑게 인사했다.
"아 예, 안녕하십니까?"
"일전에 말씀하신 거 오늘 오시면 어떻겠습니까? 세시부터 네시까지 시간이 있습니다."
"그럼 오후 3시까지 연구소에 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 시계를 바라보았다. 지금 출발하면 그의 연구실까지 충분한 시간이었다. 가방을 챙기면서 여직원에게 가는 곳과 시간 등을 얘기하고는 곧바로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두 시간 후 한기자는 연구소의 접객실로 들어섰다. 사이먼이 미리 와서 앉아있다가 일어섰다.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취재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난 번 전화상으로 약속 할 때 말씀 드렸죠, 한누리 신문사 엘에이 특파원 한가람입니다."
서로 명함을 주고 받으면서 두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반갑습니다. 사이먼 우드뱅크입니다. 창립 특집기사 준비하신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요즘처럼 환경공해문제가 화두로 자주 오르내리는 시기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이에 맞추어 국내외의 전문가분들로부터 받은 의견을 몇 차례에 걸처 싣고자 해서요."
"내노라하는 학자들도 많을 텐데 제한테까지……."
"숨은 보석이라는 말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사이먼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가 참으로 순진하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이 파악했던 그의 신상을 확인해보고자 물었다.
"외람되지만 제가 알기로는 사이먼 박사님은 한국계이신 걸로 알고 있는데……."
"네, 맞습니다. 한국 이름은 유라온입니다. 제가 6살 때 입양되어 왔죠. "
"네 그러시군요. 6살 때면 우리 말을 다 잊었을 텐데 전혀 서툴지가 않네요."
"커가면서도 고국을 잊지 않으려고 혼자 독학했어요."
"아 그러셨군요. 우리말을 잊지 않아야겠다는 그 마음가짐이 존경스럽네요."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특별한 기억이 저를 그렇게 만들었던 같습니다."
"예……."
그러면서 한기자는 가방에서 노트북과 녹음기 및 문서들을 꺼내었다. 묵묵히 한기자를 바라보는 사이먼의 얼굴을 곁눈으로 흴끗 보는데 한기자는 그가 미소를 짓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에는 알 듯 모를 듯 번지는 애절함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그 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궁금했다. 자신이 한국인이기 때문에 향수를 느낀 것일까? 아니면 자신에게서 어릴 적 고향의 모습을 발견한 것일까? 라는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지나 갔다. 그러나 일단 업무는 업무이기 때문에 인터뷰를 끝낸 다음에 그러한 궁금증을 알아보리라 생각하면서 인터뷰를 시작했다.
한시간 정도의 인터뷰가 끝날 무렵 한기자는 대단히 흡족한 표정으로 사이먼박사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오늘 인터뷰에 대해 다시 감사 드립니다."
"한기자님에게 도움이 많이 되었으면 하네요."
한기자는 만족스런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본부에서 좋은 기사라고 칭찬을 들을 것 같아요. 그런데 박사님은 한국 방문할 계획은 없으신가요?"
그 말을 들은 사이먼이 당황한 듯 약간 주저하다 답했다.
"한기자께서는 정말 대단하시네요. 이것은 진짜 오푸더레코드입니다. 저 얼마 안 있으면 한국 엠그룹의 파이토 엔지니어링 연구소로 갑니다."
"네 그렇군요. 잘됐네요! 사이먼 박사, 아니 유라온 박사님의 금의환향을 정말 축하 드립니다."
"금의환양? … 아! 뭔 말인지 알겠네요. 그러나 그 정도랄 것 까지는…… 어째든 감사합니다."
"내가 박사님에 대한 정보를 알고 그런게 아니라, 사실 오늘 박사님을 본 순간 '향수'라는 한국가곡의 음율이 나도 모르게 떠오르더군요. 우리 박사님의 눈에 고향에 대한 애절함이 너무 묻어나 있어서 그랬던 겁니다. 아무튼 귀국하신다니까 정말 잘된 것 같습니다."
"하하하, 그러셨나요? 저는 한기자님에게 꼭 뭔가를 들킨 것 같은 느낌이네요. 그리고 한기자님은, 오랜 옛적 제가 무척이나 따라다녔던 형님 같기도 하고요."
어느 새 K시 한 숲 속에 자리잡은 엠그룹 연구소로 들어 가는 입구가 나타났다. 큰 길에서는 숲으로 가려져 있어 높은 곳에 위치한 건물 몇 동이 보일 뿐 대부분의 시설들은 보이지 않았다. 연구소로 향하는 길은 왕복 2차선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지형을 따라 좌우로 커브져 있었다. 햇살이 뜨겁게 내리 비치지만 울창한 나무들이 만들어 내는 그늘들이 그 힘을 억누르고 있었고, 간간히 불어오는 산들바람 역시 덥다는 느낌을 날려보내 주었다. 200여 미터쯤 올라가자 출입문이 나타났고 양쪽에 세워진 기둥을 중심으로 해서 밀어 여닫는 철문이 반쯤 열려져있었다. 오른 쪽 기둥에는 넓직한 스테인레스 판에 푸른 글씨로 '엠그룸 파이토 엔지니어링 연구소'라는 글씨와 그 밑에 'PHYTO ENGINEERING INSTITUTE'라는 영문이 쓰여져 있었다. 그 바로 뒤로 경비실이 나타났는데 그의 차가 출입문으로 접근하자 경비실에서 차단기쪽으로 경비가 나른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가 사전에 약속했던 파이토 엔바이론 부서의 김병만박사에 대해 말하자 안에 있는 경비가 확인을 하더니 그의 차를 들여 보냈다. 정문에서도 한참 더 올라가니 그제서야 중앙 본관이 나오고 그 앞으로 차들이 가득 주차되어 있는 주차장이 있었다. 한기자는 방문자 지역으로 가서 겨우 자리를 찾아내어 주차하고 난 뒤 본관 안의 안내 데스크로 갔다. 그곳에서 다시 김박사에게 연락을 취한 뒤 접객실로 가서 기다리고 있지 얼마 되지 않아 김박사가 들어왔다. 김병만박사가 한기자의 방문이 다소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사이먼 박사는 우리 연구소에서 일했지만, 젬트리 사고 이후로는 행방불명되어 우리도 소식을 모르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무슨일로 한기자께서 그 건에 대해 취재하려고 하시는지요?"
"다름이 아니고 이제는 모두가 끝난 일이 되었지만 어째든 사이먼박사가 이 연구소에 몸담고 있었고, 특히나 바로 이 엔바이론에서 젬트리를 연구했다고 해섭니다. 혹시나 그 사이에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는 사이먼 박사의 동향이 있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글쎄요? 저희들 입장에서는 무어라 코멘트하기가 어렵군요.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가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 걸 저희들로서는 어떤 의견도 제시하기는 그렇습니다. 그리고 … 만약에 그에 대한 동향이 감지되었다면 저희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다소곳 하지만 단정적인 말투로 얘기하는 그를 바라보는 한기자에게는 무척 완강하다는 느낌을 지을 수 없었다. 더 나아가서 아주 미묘하다는 생각이 드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뒤에 꼭꼭 숨겨둔 그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는데 이를 알아낼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더 이상 진전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어차피 꺼내든 주제인데 그냥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래서 수박 겉핥기 식이라도 파악해볼 건 파악해 보자는 생각으로 부드럽게 이리저리 유도해 보았다. 하지만 의중을 간파했는지 핵심에는 전혀 근접도 하지 않은 채 관계없는 말만 늘어 놓기 일쑤여서 결국 개발 당시의 상황이야기를 끝으로 마무리하고 말았다. 다른 방법을 강구하거나 이 연구소와 사이먼과 관련된 정보를 더 입수하여 분석한 다음에 그들이 털어 놓을 수 밖에 없는 정곡을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한기자는 연구소를 나올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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