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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스토리

파이토레이드(PHYTORAID) (제22회)

by 허슬똑띠 2022. 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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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한 입씨름 (계속)

 

26. 진술(2) 계속

그러자 갑자기 가리은이 핏대를 올렸다.

"그렇다고 내가 양심과 의식구조에 대한 개념을 개뼈다귀처럼 내팽개쳐버린 것은 아니라구요. 거기에 대해 반론을 제기해보라고 한다면 아마 한 시간 가지고도 부족할 겁니다."

그러나 이내 수그러들면서 말투가 다시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내가 자라왔던 환경이 어떠했는지를 모르니 그렇게 얘기하는 거라 보고 내가 한 수 접고 말죠."

윤경위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참말로!"

그러나 죄인답지 않은 묘한 인간과 대화하는 기분이었다. 또한 순진하기조차 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오늘 내가 대단한 인물을 만난 거 같군요. 그건 그렇고 그 외의 건은?"

"아 그런데 증권거래소 건은 절대로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나쁜 짓은 하더라도 공적기관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한가지 굳은 철칙이 있습니다. 화이어 세일 같은 짓은 정말 벼락 맞을 짓이거든요."

윤경위가 그 얘기를 들으면서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마음먹기에 따라 화이어 세일까지 할 수 있다는 얘긴가요?"

"혼자서는 쉽지가 않지요. 그런데 몇 놈의 크래커들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끌어들여 이용한다면 웬만한 금융시스템이라든가 교통망을 뒤흔들어 놓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반대편 감시방에서 가리은의 자백을 듣던 차대장이 팔짱을 풀고 손가락으로 유리창 안의 가리은을 가리키며 씁쓰레한 미소를 지었다.

"저 놈 저거 희한한 놈일세! 보기보다 아는 것도 많은 것 같군."

그러나 장팀장은 그가 별다른 소동 없이 대형 사고에 대해 자세하게 진술하는 것에 상당히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그 동안 우리를 그렇게 골탕 먹였죠. 아무튼 아주 좔좔 잘도 부네요. 이제 중대사건들은 거의 종결되겠네요.

가리은이 증권사 해킹 건에 대해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제가 보기에 그런 짓을 한 놈은, 분명 증권투자자로 위장한 사기꾼놈들한테 돈을 받아먹고 주식시장을 교란 한 것이 분명합니다. 이 건은 제가 해결해 드릴 수 있습니다. 저를 믿어 주신 다면요.

"됐거든요."

이 말 끝에 윤경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장난스럽게 '피'했다.

"그건 그렇고, 가리은씨의 흥미진진한 활극을 더 들어 볼까요?"

이어서 윤경위의 가리은에 대한 취조가 계속되고 차대장과 장팀장은 감시창을 통해 계속 이 과정을 지켜보았다.

27. 진술(3)

잠시 윤경위가 녹음장치를 점검해 본 후 취조를 계속했다.

"지금부터는 이런 범죄자들과의 관계, 그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빠짐없이 진술하도록 하세요."

"나는 항상 혼자 일해 왔습니다. 아주 필요한 부분에 대한 인간 한 두 사람만 서포터로 두구요. 노이즈 같은 인물이지요. 어째든 먼저 이 이야기부터 해야겠네요. 어릴 적 고아원을 도망쳐 나온 뒤 어찌어찌하다가 운 좋게 세운상가 부근의 구두닦이 보조가 되었어요. 나는 입구에 '빛나리 구두방'라는 팻말을 붙이고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닦을 구두를 모아 오기 위해 주변 닦새들보다 1시간 전에 나서서 모조리 훑고 다녔죠. 어깨에 구두를 담을 상자를 짊어지고요."

"아니, 아니, 그렇게 먼 옛날 일까지 들추지 말고."

"그러지 않으면 내가 왜 오늘 이러한 자리에 있게 되었나 얘기가 안 돼요."

"알았어요."

가리은의 완강한 어투에 윤경위는 별 수 없다는 듯 그의 진술을 하락했다.

"그럼 계속해 봐요."

"그렇게 2년이 지났을 무렵 자주 가던 컴퓨터 가게사장이 자기 가게에서 일해보지 않겠냐는 거예요. 그 양반, 내가 구두 닦으면서도 아이디어도 내고 열심히 하는 것을 눈 여겨 봤던 겁니다. 그게 오늘이 있게 된 계기인데… 그렇게 좋게만 나갔더래도……."

갑자기 가리은의 표정이 어두워 졌다. 그의 머릿속에는 아픈 추억의 편린들이 끊임없이 몰려들어 오고 있었다.

복작거리는 세운상가의 한 컴퓨터 상점이 보인다. 한 직원이 손님들에게 피시, 노트북, 여러 크기의 모니터 등을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고 그 뒤에는 가리은이 커다란 작업대 위에 컴퓨터 하나를 까놓고 이것저것 살펴보고 있다.

침대와 책상만 놓여 있는 좁은 방. 침대 위쪽으로는 줄에 걸린 빨래들이 보인다. 가리은이 책상에 앉아서 책을 보고 있다. 한편에는 카세트가 놓여져 있다. 그의 책상 책꽂이에는 가자 각색의 책들이 꽂혀 있다.

'컴퓨터 프로그램 길라잡이', '컴퓨터 언어의 이해', '예술적인 해킹공격', '영어는 내게 맡겨라', '일본어 회화', '중국어 독해', '끝내 주는 분장술 기법', '위장술 로그인', '슈퍼 스파이 세계사', '천재들의 생각 엿보기-트리즈,' '거짓말에 대한 진실', '신무기의 역사', '사이버네틱스-오토마타와 지능로봇'.

다소 늦은 시간. 선배 직원이 퇴근하자 가리은이 손짓으로 인사하고 있다. 그가 나가면서 출입문 열리자 밖에는 어둠 속에서 각종 네온사인이 번득이고 있다. 직원이 나가자마자 사장의 쪽방에서 손님이 나간다. '안녕히 가세요!'하면서 인사하는 가리은. 그러자 그 방에서 사장이 가리은을 부른다. '예' 하고 방에 들어가자 사장이 서류철을 꺼내 놓으며 잘 좀 검토해봐 달라고 한다.

가리은이 힘없이 자기 방으로 들어와 털썩 침대에 걸터앉는다. 들고 있던 서류철을 책상 위에 내팽개친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며 한탄한다.

'나보고 어쩌라고, 정말! 참 너무 하네. 자기한테 신세 진거 갚으려면 요번 한번만 꼭 해달라고? 그래 사장 당신은 나의 은인이지. 호적도 만들어줬지, 이 사회에서 사람구실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해줬지, 덕분에 나는 이만큼 실력을 쌓았으니.'

차량과 인파들로 북적대는 길 한편에 책 한 권을 들고 가리은이 걸어오고 있다. 그 때 그의 휴대폰이 울린다. 전화를 건 사람은 그의 상점 부근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이다.

"응, 너구나! 나 은이야, 웬일이야?"

그는 속삭이지만 다급한 목소리로 얘기한다.

"지금 빨리 도망쳐. 집에도 가지 말고 딴 데로 가!"

가리은이 당혹해 하며 묻는다.

"왜? 뭔 일인데?"

"너의 사장이 금방 붙들려 갔어. 우리 사장이 그러는데 어떤 회사 해킹해서 뭘 빼낸 것이 들켰단다. 그런데 네 얘기도 나오더란다. 나는 대충 무슨 일인지 짐작하겠더라고. 그래서 급히 전화하는 거야. 그러니 정신 차리고 빨리 사라지라고."

'고마워, 정말'이란 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인파 속으로 파묻히면서 속으로 외쳐대는 가리은.

'왜 하필 나여야 하지? 제길, 왜 또 나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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