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골탈태
27. 진술(3) 계속
침울하게 자신의 과거를 얘기하던 가리은이 다소 밝은 표정으로 변했다.
"인간은 더 이상 물러설 자리가 없을 때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고 하데요. 원치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스스로 추악한 세계로 끼어들게 된 사실 자체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살고자 하는 동기가 잘못된 방법을 정당화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그것을 정당화 시켰고, 이왕지사 이렇게 된 바에야 이 세계에서 절대적인 존재가 되자고 했던 겁니다. 누군가는 '거짓말이 없다면 진실은 낙담과 권태로 죽을 지경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고 하죠. 그러나 나는 항상 이 말을 ['불행'의 순간이 없다면 '행복'한 시간들은 너무도 지겹게 느껴질 것이다'] 라고 바꾸어 생각해요."
그러면서 끝맺는 그의 말속에는 허탈감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나에게는 행복보다 불행한 순간들이 훨씬 더 많았기에…… 어째든 그래서 그나마 낙담도 하지 않고…… 권태롭지도 않게…… 지금까지 잘 버티어온 건지도 모르겠네요. 윤경위님! 끈기 있게 잘 들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취조실 옆의 감시실에서 끝까지 취조과정을 보고 있던 차대장이 가리은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다. 장팀장은 심각한 대장의 표정을 보며 물어볼 수도 없고 그 속내도 알 수 없어 답답한 표정을 짓고만 있었다.
28. 재탄생
수사대는 일련의 대형 사건이 대부분 해결됨에 따라 분위가 고조되어 있었다. 그런 가운데 수사대장실에서 차대장이 장팀장과 윤경위와 함께 회의를 하고 있었다. 다만 수사대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달리 다소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커피를 마시며 상부에 보고할 수사일지를 무심히 뒤적이면서 차대장이 무겁게 말을 꺼냈다.
"장팀장! 그 가리은이라는 친구 어떤 것 같아?"
장팀장이 다소 뜬금없다는 듯이 대장을 바로 보며 물었다.
"무슨 뜻이신지?"
그러자 윤경위가 그 의미를 캐치한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자신 없이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혹시? 그 친구의 재능을 활용해보자는 뜻이 아니신지?"
차대장은 그 물음에 미소만 지으며 계속 장팀장의 의견을 기다리는 듯 했다. 장팀장은 윤경위의 말을 듣고는 그제야 자신도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보기에도 충분히 활용가치는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윗분들이 어떻게 받아들이실는지 그게 문제일 것 같고……, 또 검찰 송치건도 풀어야할 숙제인 것 같은데요?"
그제야 차대장이 그의 속내를 털어 놓았다.
"내가 그 친구 취조 받는 태도라든가, 저질은 죄의 양상에 대해 밤새도록 분석을 해봤지. 그런데 결론은 한 가지야. 그런 친구를 법대로 그냥 썩히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거지."
윤경위도 자신이 마음속에 품었으나 쉽게 꺼내지 않았던 생각을 털어놓았다.
"사실 저도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 친구가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하고 있더군요. 그리고 외관적으로 나타나는 것보다 훨씬 아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자 차대장이 자신이 생겼는지 확정짓듯이 말을 맺었다.
"알았습니다. 이제 두 분의 의견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 뒤의 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소. 다만 두 분은 지금의 생각이 변하지 않기를……."
두 사람은 '물론입니다.'라면서 차대장의 기분을 맞추어 주었다.
'수사과장'이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는 문이 보이고 가끔 정복경관이나 사복을 한 수사관들이 그 앞을 지나치고 있었다. 그 문은 살짝 열려 있는데 그 사이로 책상에 앉아 있는 수사과장과 그 옆에 서서 얘기하고 있는 차대장의 모습이 보였다. 과장이 책상에 앉아 차대장이 내민 서류와 차대장을 번갈아 들여다보고 있었다. 차대장이 최근의 사건에 대한 얘기를 마치고 가리은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 녀석 잡기 전에는 속앓이도 많이 하고, 잡으면 한대 후려갈겨 주고 싶기도 했지만 막상 잡고 보니 그렇게 멋진 녀석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저질러온 범죄에 대한 죗값은 치러야 하는 거 아닌가? 그리고 그동안 워낙 세간을 떠들썩 해놓아 가지고……. 무엇보다도 검찰에 대한 보고가 문제야."
"그 친구가 저지른 일은 대부분 원상 회복시켰습니다. 돈도 거의 회수가 되었구요. 다만 말씀하신 대로 죄의 값을 치러야 하는데……. 당장 단죄하는 것보다 그의 재능을 최대한 활용해 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 문제는 과장님께서 해결해 주시도록 부탁드리겠습니다."
"허어! 이 사람 보게. 잘못하면 멀쩡한 사람 잡겠네."
"제가 웬만한 거 부탁드리는 거 보셨습니까? 이 놈은 저지른 죄보다도 정말 머리와 재능이 아까운 녀석입니다. 우리 수사대에서도 이러한 인물이 필요하구요. 또, 그 녀석은 자라온 환경이 그래서 그렇지 속은 멀쩡한 놈이더라고요."
"차대장이 그 놈한테 푹 빠져버렸구만. 이거 어쩔 수 없네. 하지만 앞으로 일어 나는 일에 대한 모든 책임은 차대장이 져야 하네!"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일단은 단순 보조요원으로 일하도록 하면서 지켜보겠습니다."
29. 비상대책위원회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세져만 가는 햇빛이 강도가 계속 실내의 공기를 덥다고 느낄 정도로 덮이고 있는 한낮이었다. 그나마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놓는 곳은 시원한 느낌을 주었다. 그렇게 나무 몇 그루가 그늘을 만들어 놓는 공간에 승용차 대 여섯 대가 이 주차되어 있었는데 계속해서 차들이 정문을 거쳐 들어 오고 있었다. 이곳은 정부기관에서 투자한 한 연구소가 있었던 곳으로 몇 개월전 지방으로 확장 이전하여 비어 있던 곳이다. 정부에서 불임에 대한 원인과 대책을 논의하기 위하여 부랴부랴 기구를 만들고 마침 비어 있던 이곳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장방형의 대지 위에 4~5층짜리 건물 세 동이 들어서 있고 구내에는 주차장과 잔디밭 정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담장둘레에는 무성하게 자란 큰 나무들이 드문드문 들어서있고 그들이 만드는 그늘과 정원이 치솟는 열기를 차단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본관 건물격인 중앙의 건물출입구에 여태껏 보이지 않던 간판하나가 걸려있고 세로로 길게 '비상대책위원회' 쓰여 있다. 계속적으로 도착하는 승용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이 속속 그 중앙 건물로 들어가서 2층의 회의장으로 올라갔다.
회의장에는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직원들이 가져다주는 차를 마시며 담소하고 있었다. 회의장 앞에 놓인 책상에서 도착한 사람들을 체크하고 있던 직원 한 사람이 '위원장'이라고 표지판이 붙은 방으로 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나이가 꽤나 들어 보이는 사람들이 소파에 앉아 담소하고 있었다. 들어간 직원이 가운데 앉아있는 사람에게 금번 대책위원들이 모두 도착했음을 보고하자 일어섰다. 그가 바로 비상대책위원회를 이끌어 갈 위원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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