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이상의 간극을 초월하다.
41. 경찰병원(계속)
이 때 문이 열리며 귀부인 한 분이 들어 왔다. 윤경위가 반가워하며 큰 소리로 불렀다.
"엄마! "
부인이 침상으로 급히 가면서 책망 아닌 책망을 해대었다.
"아이구 난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계집애가 그렇게 천방지축 날뛰더니 내 언젠간 이럴 줄 알았다."
가리은이 그 부인을 향해 절하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가리은이라고 합니다. 윤경위님 쫄따구죠."
부인이 그제야 그의 존재에 대해 알아차리고 멋쩍게 인사했다.
"아예. 정신없어 못 알아 뵜네요. 제 딸년 때문에 폐가 많습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제가 제대로 보좌 못한 탓인데요."
뒤통수를 긁으며 윤경위에게 '그만 가보겠다'고 하자 부인이 일어서면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윤경위가 손을 흔들었다.
"가서 잘 쉬세요."
가리은이 윤경위에게 거수경례를 하며 '옛썰! 명령대로 하겠습니다.'라고 하고나서 역시 부인에게도 거수경례를 한 뒤 병실을 나갔다.
가리은이 나간 뒤 침대 옆의 보조 의자에 앉으면서 윤경위의 모친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그래 정말로 괜찮은 거니?"
다솜이 모친의 손을 잡으며 미소 지었다.
"응! 괜찮아. 보는 것처럼 이렇게 멀쩡하잖아! 어째든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 엄마!
"그래 안심이다. 그런데 얘야, 방금 나간 그 청년도 너희 네에서 근무하는 사람이냐?
"응! 사람 어때?"
"아주 서글서글하고 허우대도 멀쩡하니 괜찮아 보인다. 그런데 네 부하라면서?"
다솜이 그 말에 웃었다.
"그 사람이 그냥 한 소리야. 그 사람은 우리 수사대의 모든 업무를 지원해주는 사람이야."
"너하고는 친하게 지내는 거냐?"
"응, 나와 한 팀이야. 어때 마음에 들어?"
"그래! 너도 좋아하는 모양인데 잘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엄마! 이런 얘기하면 싫어하겠지?"
"뭔데? 그 청년에 관한 거냐?"
다솜이 다소 주저하다 겨우 말을 꺼냈다.
"응…… 그런데 사실 그 사람 고아야."
"뭐? 전혀 그렇게 안보이던데……. 얘! 그럼 안 되겠다."
"왜?"
"왜라니? 네 아버지가 얼마나 난리를 칠 것인가 네가 몰라서 물어?"
"그 사람 원래 집안은 괜찮은 집안이었어. 부모님이 아주 어릴 적에 돌아 가셔서 그렇게 된 건데 뭐!"
"그건 그거구 현실이 더 중요한 거야."
"아이참! 아빠도 이제는 요즘 시대와 맞지 않는 그런 고리타분한 사고방식은 버리셔야 하는 거 아냐?"
"버리셨기 때문에 네게 이렇게 경찰관이 될 수 있었던 건 생각 안 하니?"
"그렇다면 가리은씨 얘기도 괜찮지 않을까?"
"그건 또 다른 얘기야!"
다솜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녀의 눈치를 살피던 그녀의 어머니는 '딴 생각하지 말고 먼저 몸이나 나아야지'하며 그녀를 다독거렸다. 두 모녀의 모습을 담은 병실전체의 모습이 서서히 작아지며 멀어져 갔다.
42. 사랑의 실체
짙푸른 싱그러움을 가져다주던 따사로운 햇빛을 시샘하듯 먹구름이 몰려오면서 주위가 어둑해 지더니 굵은 빗줄기가 모든 것을 집어 삼킬 듯 몰아쳐 쏟아지기 시작했다.
짙은 먹구름에 퇴색된 밝음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대로 먹빛으로 변하고 온 세상은 그 먹빛과 빗줄기가 함께 짜낸 촘촘한 직물들로 뒤덮여버렸다. 병원의 건물에도 비는 억세게 퍼붓고 있었다. 병실 유리창문에 어른거리는 가리온의 모습 위로도 빗줄기가 연신 두드려대며 흘러내리면서 그의 모습을 여러 가지 형태로 만들어 내고 있었다.
다솜은 병상에 앉아서 유리창문에 어른대는 가리은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다솜을 바라보고 있던 가리은이 병실을 나갔다 오더니 커피 잔을 건네며 침상 바로 옆에 놓여있는 보조의자에 앉았다. 커피 잔을 받고서도 여전히 시무룩하게 창문을 바라보고 있던 다솜이 슬며시 고개를 저었다.
가리은이 은근한 소리로 시 한 구절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여기 적힌 먹빛이 희미해질수록
그대 사랑하는 마음 희미해진다면
여기 적힌 먹빛이 마름 해버리는 날
나 그대를 잊을 수 있겠습니다.
설마 나에게 이 시구대로 하라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면서 살며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힘없이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던 다솜은 이 말을 듣고는 당황한 눈빛으로 가리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솜이 커피 잔을 병상 옆 탁자에 올려놓고 가리은의 손을 맞잡으며 그를 마주 보았다.
"내 얼굴에 뭐라고 씌어 있어요?"
가리은이 짐짓 짓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얼굴은 마음의 창이라고 하지요? 아니 얼굴이 아니고 눈이던가?"
"내 눈에 나타나고 있는 게 뭔데요?"
"사랑의 슬픔과 기쁨사이에서 그 실체를 몰라 어찌할 줄 모르고 방황하는 한 마리의 백조!"
이 말을 들은 다솜이 다소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그래요?"
가리은이 빙그레 웃으면서 그녀의 손을 두 손으로 잡았다.
"먹빛이 희미해지지 않도록 애쓰고 있기도 해요!"
그러자 다솜이 털썩 그의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몰라! 몰라!'하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가리은이 그런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사실 난 다솜씨의 마음을 믿기 때문에 아무런 걱정 없었어요. 다만 고민스러운 마음의 갈등은 어쩔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은 들었지요."
그 말에 다솜이 고개를 들고 촉촉한 눈으로 가온을 바라보았다.
"정말?"
"그럼요!"
순간 가리은의 품에 와락 안기는 다솜. 그리고 그의 입에 입맞춤을 했다. 유리창에 키스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43. 꽃가루 솜털의 또 다른 정체
수사대 취조실의 문이 열리며 얼굴에 치료자국이 여기 저기 보이는 범인이 요원과 함께 들어 왔다. 취조실 책상에 마주앉은 요원과 범인의 모습이 범인 뒤편의 감시창에 그대로 비쳤다. 요원이 한참 동안 범인과 실랑이를 벌였다. 감시창으로 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차대장과 장팀장이 고개를 절래 절래 젓고 있었다.
장팀장이 뭔가 이상한 듯 차대장을 보고 말문을 열었다.
"저놈이 일부러 저리 횡설수설하는 거 아닐까요?"
"행동과 말투가 부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으로 봐서 그런 것 같기도 한데… 한 편으로는 멍해 보이기도 해."
"저 놈도 그들 세계에서는 난다 긴다 하는 놈으로 소문난 친구더라고요."
"그건 알지만… 문득 어느 분의 말씀이 떠오르는군. '대지(大智) 즉 큰 지식은 어리석음과 같다'. 저 놈이 아무리 똑똑했다 하면 뭐해? 지금은 아주 바보 같은데."
"좀 더 지켜보도록 하지요."
그러면서 다시 두 사람은 창 너머로 취조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범인의 가방에서 소지품을 조사해보던 요원이 엄지 손가락만한 투명 캡슐을 꺼냈다. 이를 바라보고 있던 장팀장이 궁금한 듯 취조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요원이 장팀장에게 캡슐을 내보였다.
"이거 좀 수상한 거 같은데요. 혹시 마약류 같은 아닌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범인이 히쭉 웃었다. 요원이 다소 열을 받은 듯 크게 소리쳤다.
"너 왜 실실 쪼개? 이거 마약이지?"
그러나 범인은 묵묵부답이었다. 장팀장이 그것을 자세히 관찰해보았지만 처음 보는 물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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