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뭐, 누가 유부녀랍디까?
2(계속)
마고도가 무심히 이 말을 던지고 주방 쪽으로 가자 오장석은 실실거리며 침실로 들어갔다. 거실을 들러보던 마고도는 침실에서 오장석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와 곧바로 그리로 갔다. 오장석이 두 개의 통장을 흔들어 보였다. 침상 옆 탁자가 열려있었다. 급여수령용과 별도의 통장이었다.
조사해보니 별도 통장에는 지난 1년간 현금이 주기적으로 입금되었다가 현금으로 인출되는 것이 반복되었다. 세 번은 평상시의 몇 배가 넘는 금액이 가외로 입금되기도 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돈거래라… 굉장한 실마리 하나 건졌어. 짱돌!” 오장석에게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마고도는 거실 건너편의 서재로 갔다.
창가의 책상과 그 앞에 있는 앉은뱅이 장탁자를 살펴본 다음 책들이 빼곡히 꽂혀있는 책장도 뒤져보았으나 끄나풀을 잡을 만한 메모나 일지 등은 없었다. 통장 외에는 달리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없자 화재현장을 둘러보기로 했다. 집안의 감시카메라 녹화영상물을 챙기고 나서 그곳으로 향했다.
폭발의 위력을 말해주듯 집은 형체도 남아 있지 않았고 주변 나무들의 가지도 상당히 불에 타있었다. 아직 물기가 축축이 남아 있는 잔해들을 살펴보았다. 일반 가정집에서 볼 수 없는 작은 유리 조각들이 무수하게 널려있었는데 웬만큼 형체가 남아있는 것이 보이기도 했다. 마고도는 그것을 들어 자세히 관찰해본 뒤 미생물 연구소 등에서나 사용되는 실험용 기기임을 확인하고 불타버린 집이 그저 일반 가정집의 용도가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즉 이 집은 유리배의 개인 연구실이었고 그가 연구에 사용하던 어떤 것이 자리를 비운 사이 실수로 폭발하게 된 것으로 보았다. 아니면 누군가 유리배를 납치해가고 그가 연구하던 것의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폭발시켰다고도 가정해 볼 수 있었다.
화재 조사 소방관들로부터 의견을 들었다. 건물 설계도면에 따르면 당초 가정집으로 건축되었는데 반 정도를 다른 용도로 개조한 것으로 추정했다. 또한 마고도가 추측했듯이 잔해에 많이 남아있는 유리 파편 등은 실험도구들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폭발 원인을 추정하면서 처음에는 이곳에서 사용하던 화학물질에서 기화된 증기가 내부에 한동안 쌓여 있다가 전기 스파크로 인해 발생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폭발물 구성물질의 잔재로 보이는 것이 일부 발견됨으로서 이보다는 강력한 폭발물이 타이머와 함께 설치되었다가 그 시각에 맞춰 폭발한 것으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 마고도는 그렇다면 실험기기 잔해는 물론 실험실의 증거인멸을 위한 것으로 보이는 폭발물은 유리배가 행방불명된 사유를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했다.
그는 이런 추리를 보완해줄 수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해서 잿더미 잔해를 들춰보다가 아무래도 폭발에 의해 튕겨나간 것이 더 잔재를 남겼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장석과 둘이서 주변 수풀 속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마고도가 풀 섶에 움푹 잠겨있는 손바닥 크기의 노란 색 점착메모용지를 발견했다. 대 여섯 장 붙어있는 것이었는데 맨 위장은 거의 타버렸고 나머지는 반 정도 재가 된 상태였다. 아마 폭발할 당시 불이 붙은 채로 폭발풍으로 날려 와 그곳에 떨어졌지만 중간에 꺼졌을 것이다. 재가 되어 오그라든 첫 장 바로 뒤의 메모지에는 앞 장에 쓴 글씨의 자국이 나타나 있었다. 마고도는 메모용지 뭉치를 핀셋과 받침대로 조심스럽게 들어 증거물 보관봉투에 집어넣었다.
서로 돌아가기 전에 제세병원에 들러 유리배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병원 관계자는 급작스러운 그의 행방불명이 전혀 뜻밖이라면서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바란다고 했다. 환자에게 발생한 의료사고로 인한 갈등이 원인일 수도 있어 물어보았더니 그간의 기록을 보여주며 그런 불미스러운 일은 전혀 없었다고 했다. 병원에서의 그의 평판은 매우 좋았으며 혈액과 관련된 불치병 분야에서는 일인자여서 그에게 수술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어제도 평소와 다름없이 수술일정을 소화하고 다소 늦은 시간에 퇴근한 것으로 밝혀졌다. 서로 돌아와서 증거분석실에 유리배 집 감시카메라의 녹화영상과 화재현장에서 발견한 점착메모용지의 분석을 요청하고 과장에게 그 날의 조사내역을 보고했다. 나오면서 마고도는 오장석에게 메모지를 건네며 그 이메일 주소로 유리배 집에서 찍어온 그림들을 송부해달라고 했다.
다음날 유리배집 대문에 설치되어 있던 감시카메라 녹화영상 조사 담당자에게로 갔다. 그를 보자마자 오장석이 단서를 잡았냐고 다그치듯 물었다. 그는 단서가 될 만한 특별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수고 했네. 잠깐 자리 좀 비켜주겠나?” 그의 자리에 앉은 마고도는 빠르게 화면을 돌려보기 시작했다. 다소 실망한 표정으로 일어서던 그는 집에서 나오는 유리배의 모습이 꺼림한 지 엉거주춤했다가 도로 앉았다.
“이렇게 유리배씨가 나오는 장면이 또 있던 것 같은 데?”
“예, 지난 3개월 간 대여섯 번 더 있었습니다.”
담당자가 옆에서 그 모습을 차례차례로 찾아 보여 주었다. 집에서 간편한 콤비 복장으로 나와 마을 입구 쪽 방향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이 찍혀있었다. 코너로 돌아가면서 사라졌다. 그 후 세 시간 정도 지나서 유리배가 다시 등장했다.
“이거 참 재미있는 장면이네요. 잘만 하면 횡재하겠는데요.“ 옆에 있던 오장석이 화면에다 머리를 처박듯이 하면서 말했다. “근데 묘하네요. 외출하면서 저 정도 시간이 걸린다면 승용차를 몰고 가는 것이 정상적인 게 아닐까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묻고 나서 스스로 답했다.
“아! 이 동네에 애인이 살고 있는 집이 있나보다. 저 양반 기러기 아빠라 했으니 엄청 쓸쓸했을 거라고요.”
“어이쿠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제아무리 옆구리가 시리다 해도, 언감생심이지, 같은 동네에서 그러다가 돌멩이 맞을 일 있냐?”
“아니 뭐, 누가 유부녀랍디까?”
“유부녀건 무부녀건 코앞에다 애인을 두고 놀아날 정도로, 저 양반 간덩이가 그리 커 보이지는 않아. 것보다도…” 마고도가 말을 끊고 오장석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짱돌! 코너에 있는 집에도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을 거야. 그 집 녹화화면을 좀 부탁해서 보자고.” 그들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분석실을 뛰쳐나갔다.
2시간 여 만에 조사실로 돌아온 두 사람은 화면의 움직임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코너를 완전히 돌아와서 뒷모습을 보이며 점차 멀어져 가던 그는 마을입구 쪽에서 올라오는 도로와 맞닿은 삼거리까지 나갔다. 도로변에 주차되어 있는 차량 중 한 대의 승용차 조수석에 올라타자 마을 입구방향으로 나갔다. 차종은 벤츠인 것으로 보이나 번호는 확실하지 않았다. “지금부터 전문가가 나설 차례군.” 마고도는 조사담당자에게 눈을 찡긋 하며 자리를 넘겨주고 오장석에게 나가자는 손짓을 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지만 유리배씨와 화가사이가 보통이 넘는 것으로 보이거든.” 차에 올라타면서 마고도가 말했다. 친구에게 그림을 확인 결과 진초희라는 화가로 밝혀졌는데 문앤썬갤러리로 가서 확인해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인근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문앤썬갤러리로 갔다. 사장인 김경진은 부재중이었으나 곧 돌아올 것이라고 해서 그림들을 둘러보며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50대 중반의 여인이 들어왔다. 신분을 밝히고 진초희라는 화가에 대해 알아볼 것이 있다면서 사진으로 찍은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망설이다가 두 사람이 웬만큼 내용을 조사했었을 것이라 보았는지 그녀의 화가생활 초창기 때부터 친밀하게 지내온 사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림은 진초희의 작품임에 틀림없으나 공개된 작품은 아니라고 했다. 말끝에 그림은 어디에서 확인된 것이고 그녀를 조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따지듯 물었다. 오장석이 얘기 하려는 것을 마고도가 잽싸게 막으면서 설명했다. 이 그림의 소유자가 도난당했다고 신고를 해왔기 때문인데 그가 진초희라는 화가한테 직접 산 것이라고 해서 참고로 화가당사자를 만나보려는 것이라고 했다.
말이 끝나자마자 거의 활동을 하지 않는 그녀를 굳이 조사해야 하는 지 캐물었다. 마고도는 그러거나 말거나 덤덤하게 활동을 하지 않은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지 되물었다. 김경진은 최근에 결혼한 그녀 남편의 요청 때문이라고 비웃듯이 대답했다. 괜스레 그녀를 조사한다고 들쑤시면 남편에게 누(累)가 될지 모르니 삼가 해주었으면 한다고 고압적인 투로 말했다. 마고도는 난처하게 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그녀의 연락처를 요청했다. 망설였으나 거부하지는 않았다. 연락처를 적은 메모지를 받고 나서 자기들이 다녀갔다는 사실은 비밀에 붙여달라고 하고 나왔다.
두 사람이 나가고 난 뒤 김경진은 전화를 걸었다. 지금 경찰이 다녀갔는데 그림을 찍은 사진을 가지고 오는 바람에 있는 대로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며 다소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그들이 찾아가거나 조사할 것이 있다면서 출두하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림 도난 때문이라고 하니 그다지 신경 쓸 것은 없다고 하면서도 신중히 대처하라고 했다. 일방적인 통화를 끝내고 난 뒤 재차 전화를 걸었다. 형사 두 명이 찾아와서 진초희와 그녀의 발표되지 않은 작품에 대해 물어보고 간 사실을 말했다. 이유는 진초희의 그림을 소장한 사람이 도난당했다고 신고한 때문이라고 마고도가 꾸며댄 거짓 사유를 그대로 전했다. 상대방이 누구냐고 묻는 것 같았다. 그녀는 마고도경위와 오장석경사라고 알려주고 더 대화를 나눈 뒤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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