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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스토리

물에 잠겨 보이지 않는 작은 바위를 여 라 부른다고 하던데… (DH바이러스(제4회))

by 허슬똑띠 2022.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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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한 진술

 

2(계속)

 

문앤썬 갤러리에서 나오면서 오장석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갤러리 사장 말하는 투로 봐서는 진초희와 결혼한 남자가 상당한 유명인사거나 거부라도 되나보죠? 그렇다면 나라도 그림 그리는 걸 접겠네요. 남자가 그 정도 신분이라면, 뭐가 아쉽겠어요?”

“그럴까? 내가 보기에 진초희라는 사람은 그림을 그리게 된 깊은 사연이 있는 것 같아. 절망과 뒤섞인 기다림이랄까, 암튼 그런 거… 헌데 그만 자포자기 상태가 되지 않았을까? 누군가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을 만나보고는 다소간이나마 자신의 마음을 의지할 사람으로 보여 결혼했겠지만… 허전한 마음을 다 채우지는 못했을 거야. 지금도 남편 몰래 계속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몰라.”

“참, 팀장님은 가끔 무슨 심리분석가처럼 보인다니까요.” 오장석의 말에 마고도는 좀 머쓱한지 그를 재촉해서 차에 올라탔다.

다음 날 분석실의 연락을 받고 들어가자 담당자가 조사내역을 내밀었다. 일부만 잡힌 차량번호는 그마저도 식별이 가지 않을 정도로 희미해서 하는 수 없이 동종, 동급의 승용차를 모두 조사해보니 50여대가 나왔다고 했다. 두 사람은 차례로 소유주를 훑어 나갔다. 중간쯤에 집히는 이름이 나왔다. 전날 확인했던 화가 진초희와 같은 이름이었다. 주소지를 확인해보니 뜻밖에도 태양그룹 오연근회장이 튀어나왔다. “그룹회장 부인이 유리배씨 집에 슬쩍 슬쩍 왔었다는 게 뭘 뜻하는 걸까요? 팀장님 말마따나 이 두 사람, 보통 사이가 넘는 모양이네요.” 오장석이 재미있어 하며 말했다.

“그런 연유로 부인이 그림을 선물했던 게 아닐까? 그것도 부러 발표하지 않은, 자신이 가장 맘에 드는 작품으로 말이야. 일례로 내가 관심 있게 본 거 있었잖아?”

“아, 예. 수평선이 보이는 바다그림 말이죠?”

“그래. 난 그 그림에서 주목한 게 있지. 물에 잠겨 보이지 않는 작은 바위를 여 라 부른다고 하던데…”

“여 요? 팀장님은 별 걸 다 아시네요.”

“평소 물에 잠겨있는 여를 파도가 치면서 약간 드러내도록 한 것에는 남모르는 뜻이 담겨있을 거란 느낌이 전해져 오더라니까.”

“단순히 옛날 애인과 헤어졌던 바닷가가 생각나 감상에 젖었었던 게 아니고요?”

“딱히 그건 아니라고도 말 못하지.”

마고도는 빙긋거리며 부정도 하지 않았다.

 

진초희를 직접 조사하기 전에 태양그룹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다. 태양그룹은 세간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견실하다고 소문났는데 특별히 꼬집어 낼만한 것은 없었다. 오회장은 75세의 나이에도 건강한 편이었으며 7개월 전에 43살이며 대단한 미인이라고 소문이 난 진초희와 재혼하였다. 그녀는 초혼이었다. 사생활에도 꼬투리를 잡을 만한 것은 없었다. 유리배도 그룹과는 물론 오회장과 사적인 연분은 전혀 없었다. 연결고리가 있다면 1년 전 오회장이 유리배가 근무하는 제세병원에 입원했다가 그에게 직접 수술을 받은 경력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녀가 최근 3개월 동안 유리배와 가끔 만나왔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그녀가 그전부터라도 유리배와 연관성이 전혀 없다고 단정 짓지 못하게 하는 증거였다. 그녀가 오회장과 결혼하게 된 연유에 대해서는 제쳐두기로 했다. 오장석이 씩씩거리며 조사해보다가 한 가지를 건져냈다. 두 사람은 같은 대학교 출신이었다. 여기에도 난점은 있었다. 학력을 조사해보았더니 유리배가 의대를 졸업할 당시 진초희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으니 함께 대학에 다닐 수가 없었다. 나이 차이는 10살이었으나 유리배가 1년 늦게 초등학교에 취학했고 재수하여 대학교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두 사람은 진초희로부터 직접 얘기를 들어보고 단초를 잡아보기로 했다.

 

3

진초희는 문앤썬 갤러리 사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직후에 그녀 그림의 도난 건 때문에 경찰이 자신을 조사하고 있다는 말이 이해가 안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유리배의 행방불명과 연관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불안감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의 집을 조사했을 것이고 그에게 선물했었던 그림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단정했다. 이유를 물어보면 오회장이 연결시켜주어 그림을 매각한 것이라고 변명하기로 하고 마음을 다잡았으나 초조함은 씻기지 않았다. 휴대폰의 진동음이 울리자 깜짝 놀라 확인해보았으나 모르는 번호였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는 있었지만 여린 가슴은 쉽게 전화를 받도록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집전화가 울렸다.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예상과 달리 정중한 말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상대방의 신분을 확인한 후 기어가는 목소리로 그러겠다고 답했다. 오회장은 출근하고 집에 없었다. 차를 몰고 삼청동의 약속장소로 갔다. 작은 갤러리에 들어서서 이층으로 올라가자 그녀의 도착을 알고 있는 것처럼 방문이 열렸다. 마고도가 화랑에 온 것처럼 보였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면서 그녀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그가 미소를 띠며 신분을 밝히자 옆에 있던 오장석도 자신을 소개했다. 그녀는 주춤거렸으나 그들의 정중한 태도에 마음이 놓였다. 특히 마형사라는 사람은 경찰답지 않게 인상이 무척이나 온후했을 뿐만 아니라 당장은 퍼뜩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와는 아주 특이한 연분이 있음을 직감했다.

 

긴장을 푼 그녀는 오장석이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마고도가 요청에 응해준 그녀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며 유리배박사의 납치범을 쫓는데 도움을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아연 긴장했다. 예상했던 대로 도난 건 때문이 아니었다. 어떤 방향으로 튈지 걱정스러웠지만 고개는 끄덕였다.

“사모님은 유박사집에 오셨던 적이 여러 번 있으시더라고요.” 마고도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오장석이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뒷말을 이었다. “그 때마다 유박사와 함께 어디론가 가셨고요.”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이들은 이미 그녀가 유박사와 은밀히 만나고 있던 사실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명백한 증거를 가지고 그녀를 보자고 했을 텐데 이리저리 변명한다고 통할 것 같지가 않았다. 체념하고 말문을 열었다.

그녀가 유리배와 재회한 것은 결혼하기 전 오회장 집에서 열린 가든 파티에서였다. 많은 손님들이 북적거렸는데 오회장이 직접 그녀에게 소개해준 사람이 있었다.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아무리 긴 세월이 흘렀어도 한 눈에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예전에 제세병원에 입원했다가 큰 신세를 졌었던, 혈액관련 분야에서 최고의 권위자인 유리배박사라고 추켜세웠다. 둘이 겸연쩍게 인사를 나누는데 오회장이 기분 좋게 웃는 바람에 다행히도 티를 내지 않고 가까스로 진정할 수 있었다.

“두 분 사이에 깊은 사연이 있었던 모양이네요?” 오장석이 궁금해 하며 물었다. 그녀는 대답도 없이 그 사연을 이어나갔다.

 

그녀와 유리배의 인연이 시작된 것은 중학교 2학년 초에 그가 과외선생으로 오면서부터였다. 나이보다 조숙했던 그녀는 공부보다는 멋지게 생긴 그를 바라보는 데 정신이 팔렸다. 심지어 과외를 시작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그에게 사랑고백을 하기조차 했다. 무척이나 당황해 하던 그는 그녀를 달래서 공부를 시키기 위해서인지 만일 자기가 다니는 대학에 입학하게 되면 그녀와 정식으로 사귀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그녀는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그 후로는 공부에 전념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올라갈 때 학교를 졸업한 유리배가 군의관으로 군복무를 시작하면서 소식이 끊어지는 바람에 의욕을 읽게 되었고 공부는 제쳐둔 채 그림에 빠져들었다. 그림은 모두 유리배와 관련된 것뿐이었다. 애를 태우던 그녀 부모가 수소문해서 군복무중인 그를 찾아와 사정하는 바람에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그녀와 함께 하게 되었다. 이로서 마음을 다잡은 그녀는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는 그녀 곁에서 지켜보며 대학진학 시까지 보디가드 역할을 충실히 해주었다.

 

그녀가 대학에 들어가자 유리배는 공개적으로 그녀를 애인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완전히 그를 정복했다 싶었는데 그렇게 오래 가지 못했다. 그가 제대하고 나서 대학병원에 근무하던 어느 날 다른 여자와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을 목도하고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다. 병원에서 정신을 차렸지만 상심은 너무도 컸다. 집을 뛰쳐나와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 바다에 몸을 던졌지만 불행이랄까, 어부의 손에 살아나고 말았다. 이게 운명인가보다 체념하고 바닷가에서 살면서 그림만 그렸다. 모든 걸 포기했어도 유리배가 그리운 건 어쩔 수 없어 그림에 그를 담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의 모습이 아른거리는 게 싫어 그림 속에 숨겨두었었다. 기가 막힌 건 사람들은 이해도 못하면서 그런 그림을 마냥 좋아했고 그 그림을 찾던 사람들 덕분에 여기 저기 인연을 맺었다. 그러다 화랑을 경영하는 김경진 사장을 만났던 것이다. “수평선 그림에서 살짝 보인 ‘여’가 유박사를 그리워하는 마음의 표현 아니었습니까? 마고도가 묻자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끄덕였다.

진초희와 유리배의 관계에 대해 다 듣고 나자 두 사람은 떨떠름했다. 그녀가 깊이 사랑해왔던 유리배를 해코지하는데 가담했다고 보기는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마고도는 그녀의 맑고 커다란 눈과 체체한 몸가짐, 여리게 느껴지는 마음 등으로 판가름해보건대 그녀의 고백에는 거짓이 담겨있지 않으리라 믿었다. 그런 전제하에 그녀가 결혼 한 후로 오회장이나 유리배 주변에서 듣고 보았던 일들 중 참고할 만한 것들을 빠짐없이 말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녀는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더니 과연 도움이 될 만한 것인지 모르겠다면서 얘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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