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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스토리

임종(臨終)이란 단어는 이제 내 사전에는 없어. (DH바이러스(제5회))

by 허슬똑띠 2022.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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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한 검진 환자

 

3(계속)

 

행방불명되기 한 달 전쯤이었다. 유리배가 매우 들떠있는 것 같았는데 우연히도 오회장 역시 기분이 매우 좋아보였다. 그즈음 회장이 술에 만취되어 밤늦게 귀가했다. 술을 좋아하는 편이었으나 그토록 마신 것은 처음 보았다. 기분도 좋고 부회장이 하도 술을 권해 어쩔 수 없이 마셨다고 했다. 잠자리에 든 지 얼마 안 되어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깼다.

‘임종(臨終)이란 단어는 이제 내 사전에는 없어.’ 뜬금없는 잠꼬대에 픽 웃음이 나왔으나 그의 기분이 어땠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얼마 못가 유리배의 표정은 침울하게 변했다. 왜 그러는지 물어보았더니 생각지도 않은 일이 드러났기 때문에 고민 중이라고만 했다. 곧 해결될 것이라고 해서 더 이상 묻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가 홀연히 사라지자 그 때의 행동이 이에 대한 예고였던 것 같이 느껴진다면서 고개를 숙였다.

 

진초희와의 대화에서 건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은 행방불명되기 전 유리배가 진행하고 있던 일이 상당한 진척이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오회장과 유리배 두 사람이 동 시기에 들뜬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유리배와 오회장은 사전에 밀약을 맺었을 것이고 유리배의 통장에 주기적으로 입금된 거금은 오회장으로부터 흘러들어온 돈일 것이다. 또한 연구내용에 대해서 정확히 유추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지만 그토록 많은 돈이 건네졌다면 상상을 초월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다만 유리배가 그녀와의 밀회를 즐기면서도 그가 진행하고 있는 일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한 적이 없었다는 점이 아쉬웠다.

마고도와 오장석 두 사람과 대면하고 돌아온 진초희는 어리둥절했다. 그들이 유리배와의 깊은 관계에 대한 명확한 증거를 포착했으면서도 대놓고 그녀를 서의 조사실로 호출하지 않았던 것은 작지 않은 배려로 생각되었다. 오연근회장의 후광은 결코 아닌 것 같았다. 그보다도 그녀에게는 마경위라는 존재가 왜 그토록 가슴 시리게 만드는 것인지가 더 의문이었다. 그날은 종일 그의 얼굴이 눈앞에서 떠나지 않았으나 그 이유를 명확히 밝혀내지 못해 끙끙 앓기조차 했다.

 

서에 들어오면서 두 사람은 또 다른 단서일 수도 있는 메모용지를 확인하기 위해 조사실에 들었다. 조사담당자가 화면에 확인한 글씨를 보여주었다. ‘오후 6시 샤링’이라는 글자와 그 밑에 휴대폰 번호가 적혀있었다. 오장석이 재빨리 수첩에 그 번호를 적었다.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조사실을 나오자마자 그 휴대폰으로 전화해보니 여성이 전화를 받았다. 신분을 밝히고 어떤 사람이 행방불명되어서 추적중인데 참고조사를 해야겠다고 했다. 황당해 했으나 침착하게 6시까지는 시간이 된다고 해서 그녀가 근무하고 있는 일루체라는 칵테일바 인근으로 갔다.

커피숍에서 함께 자리한 다음 혹시 샤링이라는 데서 만날 약속이 돼있지 않은가 물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며 엊그제 그녀가 비번이라 가게의 단골손님과 만나 저녁식사를 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는데 그가 급한 일이 있다면서 난데없이 약속을 취소했다고 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의 신상명세에 대해 묻자 주저하다가 털어놓았다. 도진우라는 사람인데 연구소에서 근무한다고 했으며 후리후리한 키에 서글서글해서 호감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그 역시 그녀를 좋아해서 일루체에 자주 들르는데 그날 처음으로 데이트 약속을 해왔다는 것이다. 그녀로부터 그의 휴대폰 번호를 확인하고 나서 그에게 전화를 해보라고 했다. 자신들과 있다는 말은 하지 않도록 사전에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해지된 전화라고 나온다며 의아해 했다. 그러면서 문득 생각난 듯 샤링에서 기다릴 적에도 그 가게전화로 연락이 와서 받았다고 했다. 그때는 왜 자기 휴대폰으로 직접 전화하지 않았는지 궁금했으나 그만한 사유가 있으려니 하고 말았다고 했다.

 

도진우가 유리배 연구실에서 근무했던 것이 드러나기는 했는데 최근 움직임이 적지 않게 수상쩍어 신상조사를 해보았다. 그는 영웅대학교에서 미생물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까지 받았으나 남의 연구를 도용한 것이 들통이나 학계에서 배척당하다 시피 했다. 겨우 미생물 관련 벤처기업인 퓨처스의 연구실에 입사해 근무하다가 10개월 전 쯤 퇴사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가 퇴사한 것은 유리배와 합류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추측되었지만 유리배가 중대한 연구에 이런 엉터리를 참여시켰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현재 그 또한 사라진 상황이기 때문에 당장 그 사유를 캐보기에는 산 넘어 산이라 일단 의문부호로 남겨 두기로 했다. 도진우가 근무했었던 회사를 조사하다보니 묘한 일치가 느껴졌다. 그가 퇴사하기 얼마 전 이 회사가 M&A되어 경영권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는데 별로 안 좋은 소문이 나있었다. 누군가 사채자금을 동원해 알짜기업인 이 회사를 들어먹기 위해 불법에 가까운 방법으로 이 회사를 인수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경영권을 쥔 자들이 회사를 말아먹다시피 해서 휘청거리는 상황이었다.

 

두 사람은 방향을 돌려 유리배의 행적에서 그의 연구목적과 관련된 단서를 찾아보기로 했다. 1년 전 현재의 집으로 이사한 것과 휴가기간 중 미국에 있는 처자식을 방문했었던 것 등 평범한 일상뿐이었다. 그가 연구하던 일과 관련하여 주변에서 떠도는 소문이 있지 않은가 해서 조사해보았으나 헛소문 하나 없이 깨끗하기만 했다. 허탕치고 돌아와서 자리에 앉으려다말고 그대로 선 마고도가 오장석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양반이 수술했던 환자들로부터 그가 비밀리에 하고 있던 일이 어떤 것인지 유추해볼 순 없을까?"

마고도의 이 말에 오장석이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냈다.

”유박사가 오회장을 치료했다고 했잖아요. 행여 그 양반, 심각한 병에 걸렸기 때문에 그걸 치료하기 위한 특별 치료약을 별도로 개발해 달라고 하지는 않았을까요?“

“오회장 그 할배는 아닌 것 같은데? 병원에서 확인해보았을 적에 그 양반 죽을 정도의 병은 아니었거든. 거기에다가 지금까지 멀쩡하잖아.”

“그러네요. 아니면 그 양반 말고 불치의 병으로 고생하던 사람이 따로 있었는데 그 사람이 병을 고칠 수 있는 약을 개발해 달라고 했다는 가정은 어떨까요?“

“좋아! 연속적으로 이어가 볼까? 유박사가 그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개인적으로 연구하다가 생각지 않은 비법을 찾아냈는데 상업적인 개발까지는 엄청난 비용이 수반된다. 그 때 퍼뜩 오회장이 생각났다. 돈 많은 사람이니까. 이런 전개방향은 어때?”

그래놓고 자신 없이 덧붙였다.

“내가 지나치게 소설을 썼나?” 오장석은 그게 확실한 것 같은데 무슨 말이냐며 방방 떴다.

 

주저 않고 제세병원으로 간 두 사람은 유박사가 지난 2년간 수술하였거나 검진했었던 환자들의 리스트를 요청했다. 자료에는 오회장을 포함하여 사회적으로 저명한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 특이하게도 환자본인이 검진의뢰를 하지 않은 사람이 딱 한 사람 있었다. 미약하나마 끄나풀을 잡았다고 생각하여 그가 특별히 종합검진을 받았던 사유를 알아보았다. 담당 간호사는 그 환자가 검진 1개월 전에 지방에서 큰 교통사고를 당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두 사람의 표정이 일시에 멍해졌다. “제기, 그것 때문인가?” 오장석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마고도는 잠시 허공을 응시하다가 오장석의 어깨를 툭 쳤다. “가만! 그 때문이라면 당사자가 후유증이 걱정되어 스스로 검진을 받으려 했어야 하는 거 아냐? 헌데 이 사람은 사고와는 전혀 관계도 없던 유박사가 나서서 아주 세밀히 검진을 했어! 그 배경이 괴이하지 않아?”

 

곧바로 교통사고로 입원했었던 당진종합병원으로 향했다. 고속도로의 버스전용차로 무단질주는 물론 과속도 할 수 있는 데까지 했다. 오장석의 굳은 표정이 슬슬 풀렸다. 우당탕탕 병원으로 달려 들어가 안내 데스크에서 신분증과 함께 양휘윤의 검진내역을 들이 밀며 그의 치료를 담당했던 의사를 찾았다.

직원의 안내로 고풍운박사를 만나 상세한 얘기를 들었다. 그는 양휘윤이 응급실로 들어왔을 적에는 거의 죽음에 이른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긴급한 외상치료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도 못되어 스스로 치유되더니 멀쩡하게 살아났다면서 그건 기적이라고까지 표현했다. 그의 혈액에서 발견된 특이 인자로 인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자료를 보자고 했더니 입원기록만 남아있다면서 사유를 설명했다. 양휘윤이 퇴원하고 나서 두주가 지났을 즈음 그는 서울에서 열린 외과 세미나에 참석했다가 고등학교 선배인 유리배를 찾아갔었다. 그에게 양휘윤 사건을 설명하고 혈액의 정밀분석을 요청했다. 유리배로부터 어렵사리 동의를 받은 그는 병원에 내려오자마자 대부분의 분석 자료와 관련 혈액 샘플을 유박사에게 보냈다. 그는 빠른 시일 내에 결과를 알려주겠다며 대상자인 양휘윤이라는 사람의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했다. 유박사가 양휘윤을 부러 병원으로 오게 하여 재검진한 근본이유였다. 그 뒤 유박사로부터 기대했던 만큼에 걸맞은 소식을 듣지 못해서 잊고 말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유박사에게서도 그에 관한 일은 끝난 것일 수 있었다.

“어쨌든 이 사람이 결정적인 열쇠를 쥐고 있다고 봐도 되겠네요.“ 오장석은 개의치 않고 들떠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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