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이곳을 ‘신세계’라 불렀다.
4. 추측(계속)
“맞아! 어째든 너하고 예전처럼 거나하게 취해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는데 어찌어찌 하다 보니 그래 되었다. 그건 그렇고 화물선을 좌초시켰다는 그 빙하를 너는 어떻게 생각 하냐? 극해도 아니고 아열대 지역 바다에 말이야.”
“글쎄다. 가끔 빙하에 대한 뉴스나 기사를 보긴 했지만 사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연구개발 때문에 그리 관심을 갖지 않아서 뭐라 얘기할 게 없네 그려. 그래도 넌 민완기자라 소문도 났고 했으니 정보도 많을 거고 또… 유별난 소식도 있을 거 같은데?”
“그런 소리하지 마라, 민완은 무슨 민완? 그런 말 때문에 죽을 둥 살 둥 했었던 게 수도 없이 많았는데… 좌우지간 별 것 없을 줄 알았는데 막상 돌아와서 보니 이것저것 챙겨야 할 것들이 제법 많더라고. 그리 시간을 보내다보니까 신통방통한 것이 걸려들 여지나 있었겠어? 그런데 말이야…”
이 말을 필두로 해서 한기자는 윤정호에게 들었던 얘기를 그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창곤은 한기자의 말을 듣다보니 생각지 않게 예민한 문제일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어 나름 추리를 해보기 시작했다. 얘기를 듣고 있는 창곤의 눈이 새삼 반짝반짝 빛을 발하는 듯 보이자 한기자는 그가 생각을 정리하고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렸다. 보람이 있었다. 창곤은 그곳으로 거대한 빙하가 흘러오기까지 누구 하나 이를 눈치 채지 못했던 이유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또한 그 빙하가 그냥 빙하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는 한기자 후배의 의견에 대해서도 그는 그럴 듯한 가설을 내놓았다. 그제야 한기자는 어느 정도 성이 찼다. 창곤은 한기자와의 대화가 끝나자 웃으면서 자신은 지금 중요한 실험에 몰두해있으므로 허구가 아닌 진실은 한기자가 밝혀낼 일이 아니냐며 그에게 떠넘겼다.
나름 눈길을 끌만한 기사정도는 될 것이라 판단했었기 때문에 약간 상기되어 초고를 내밀었던 한기자는 예상치 못한 국장의 퇴짜에 머쓱해질 수밖에 없었다. 국장은 구체적인 증거도 없이 단순히 한 선원의 이야기에 기초하여 추측기사를 쓰는 것은 무리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이것이 빙하에 대한 본격적인 기사의 시작이고 또한 빙하에 유래에 대한 이창곤의 가설보다 유력한 설득력을 지닌 것이 어디 있겠느냐며 국장을 이해시켰다. 다음 날 W신문에 실린 해빙관련 기사는 대박까지는 아니지만 대단한 히트를 쳤다. 기사는 먼저 화물선의 좌초경위와 구조선의 구조 활동내용을 밝힌 다음 해빙의 정체가 무엇인가에 대한 추측성 내용도 덧 붙여졌다.
‘전대미문의 빙하의 정체?
이것은 과연 어떻게 아열대지역인 동중국해역에 나타난 것일까?
동중국해에서 유빙이 나타난 경로나 이유에 대해서는 누구도 속 시원한 답변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비전문가의 의견을 들어보기로 했습니다. 한 벤처기업의 이창곤 사장은 나름대로 구상한 가설을 제시했습니다.
Q 북극이나 남극의 해빙이 왔다고 가상한다면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여기까지 흘러올 수 있을까요?
A 극지에서부터 현재의 해역까지는 여간 먼 거리가 아닙니다. 그 머나먼 거리를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여행해 왔다면 대단한 기적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실상은 불가능 하지요. 그래서 나름 생각해 본 것은 잠행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동중국해에 나타난 유빙이 빙야의 형태라고 했으니 밀도가 아주 높아 바다 속에 많이 잠겨있어서 쉽게 나타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합니다.
Q 그것도 일리가 있는 생각이군요. 그러나 확률로 본다면 거의 0퍼센트에 가깝다고 여겨지는데요. 다른 요인은 없을까요?
A 사실 저도 그 확률은 거의 없지 않나 봅니다. 그렇다면 그곳에서 직접 생성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저는 이런 과정을 거쳤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아무도 가볼 수 없는 심해 속에는 호극성(好極性) 박테리아가 분명 존재할 것이라 판단합니다. 엄청난 압력과 어둠 그리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극한 조건에서는 절대로 생명체가 살 수 없다는 단정을 비웃기나 하듯 말이지요.
Q 아 맞습니다. 생명체가 도저히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곳에서 사는 그런 생물체 말이지요. 그렇다면 이들이 그 유빙을 만든 정체일까요?
A 저는 여기에 다른 변수가 작용되었을 것이라 판단됩니다. 변수란 해저에서의 화산활동에 의한 용암의 분출입니다. 이 용암의 각종 성분을 흡수한 박테리아가 이상 변이를 일으키고 이것이 얼음을 생성하는 성질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듭니다.
이러한 기사가 나가자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다만 전문가들은 전혀 근거 없는 어이없는 추측이라면서 호되게 비판을 가하기는 했지만 인터넷 누리꾼들로부터 대단한 지지를 받았으며 이창곤이라는 이름도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5. 대치
구조선이 떠난 뒤 청해함에서 조사선 팀장에게 자세한 설명이 주어졌다. 조사팀원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해빙 모양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분명 남북극해의 그것과 전혀 다른 성질일 것이므로 정확한 분석을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얼음 일부라도 채취하여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청해함의 이야기가 있는 터라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해빙에서의 활동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도하는 것은 무모하기도 했지만 스스로 목숨을 가져다 바치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었다.
그래서 일단은 간접 방법을 쓰기로 했다. 해빙과 관련한 부유물이 존재할 것이라는 판단 하에 이를 확보하여 조사해보기로 하고 빙원 주변의 여러 곳에서 바다 물을 퍼 올렸다. 각종 첨단 장비들을 통하여 신속하고도 세밀한 분석이 이루어졌으나 본질에 근접할 만한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다만 해빙 주위의 해수온도가 주변 해역보다 급격하게 낮아졌다는 것과 이로 인해 해빙의 주변 바다에 서식하던 대부분의 미생물들이 사라졌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 역시 중대한 변화임에는 틀림없었다. 해빙이 바닷물을 계속 냉각시켜 바다 생태계를 어지럽히고 있다는 간접 증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피해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해빙이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일단 북극에서 왔다는 가정 하에 그곳으로 끌고 가 원위치 시키는 것이 상책일수도 있다는 의견들이 나왔다. 그러나 해빙의 규모로 보아 이를 예인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일단 필요한 예인선의 수를 계산해보기 위해서는 바다에 떠있는 해빙의 면적뿐만이 아니고 어느 정도 바다 속에 잠겨있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조사선의 장비로 바다 속을 조사하던 조사단원들은 이게 단순한 빙하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자체 관측기기로서는 바다 속으로 잠겨있는 부분의 끝을 가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때 한 조사 요원이, 배가 있는 방향으로 해빙이 다가와서 당연히 유빙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구조선 선장의 말을 상기시켰다. 그렇다면 정말로 해빙이 스스로 커지면서 접근해 왔던 것일까?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해빙을 조사한 데이터에 의하면 그럴 개연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닌 듯 했다. 그래서 관측위성으로부터 자료를 수신 받아 해빙의 시간대별 변화를 추적해보기로 했다. 6시간의 변화를 추적한 결과 해빙이 스스로 커지고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틀리지 않았음이 증명되었다. 실제 단순한 유빙이 아니었던 것이다. 표면적이 시시각각 늘어나고 있었다.
그렇다면 해빙에는 스스로 생장을 유도하는 하는 정체불명의 생명체가 존재할 수도 있었다. 조사방향이 확실히 잡혔다. 조사단장은 해빙을 채취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실효성 있는 기기들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국토해양부에 협조요청을 보냈다. 아무래도 필요한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절단기기가 필요할 것 같았다. 해빙에 대한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고 애초 이 빙하를 활용하기 위하여 본국으로 예인해 가려던 것은 헛되고 헛된 꿈에 지나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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