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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스토리

아 그거요? 이제 보니 ‘나’라는 것은 ‘일인칭 대명사’ 네요! (염빙 바이러스 (제9회))

by 허슬똑띠 2022.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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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곳을 ‘신세계’라 불렀다.

 

 

6. 소행성 - 에피소드1(계속)

 

형수와 도련님

 

서구적인 스타일에 서글서글한 눈매를 지닌 서린은 달걀처럼 갸름한 얼굴에다 보일 듯 말 듯 양 볼에 나있는 보조개가 은근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창곤은 형수와 가끔 대화를 나누곤 하였는데 형수가 이런 면을 지닌 것도 그러했고 어리광을 다 받아 줄 수 있을 것 같은 누나와 같아서 너무 좋았다. 대화를 나누면서 서린은 병곤의 아픈 기억을 알게 되었고 미처 털어내지 못한, 그 기억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고는 했다. 병곤이 6살 위인 서린을 누나처럼 대하는 데에는 병사한 누이를 그리워한 탓도 있었다.

 

병곤이 대학에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은 봄날, 교정을 나서다가 라일락 꽃향기에 취해 잠시 멈추어 서서 음미하고 있던 중 갑자기 형수가 보고 싶어졌다. 결혼한 후로는 따로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자주 볼 수 없었다.

“며칠 전 고등학생 때 간간히 썼던 일기를 보다가 예전의 치기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속으로 얼마나 빌었는지 몰라요.”

음식점의 좌석에 앉으면서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았을 때의 미소가 어느 사이 심각한 번민으로 변해진 병곤이 그녀의 눈빛을 피하며 말을 꺼냈다.

“저는 도련님이 형님과 달리 생각이 매우 깊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런 점이 감수성을 예민하게 만들 수도 있어요.”

“정말 그럴까요?”

“저도 그런 적이 많이 있었어요. 그것은 제 집안의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도련님! 혹시 이런 경험해보신 적 있지 않아요? 부슬비가 내리는 늦은 밤, 길가의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다가 불빛에 비친 빗줄기들이 수없이 많은 나비들로 변하여 춤추며 날아가는 것처럼 보이던 그런… 환상 비슷한 거 말예요.”

 

“정말! 누나도 그런 거 보신 적이 있어요? 저도 가끔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늦게 나오다가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어요. 이런 것은 다른 사람에게 얘기해보았자 멍청이 취급받기 십상이죠. 역시 누나는 저하고 심리적으로 통하는 데가 있는 것 같네요, 그것도 아주 깊게…”

“네~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전에 형님한테 들은 적이 있는데 무슨 사고를 친 적이 있다면서요? 그것 좀 얘기해 줘요.”

이 말에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조금 망설이다가 형수의 부드러운 눈빛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저는 형과 달리 아주 내성적이고 소심했었어요.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다른 애들과 잘 어울려 지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변했어요. 아마도 본질이 그것이었는데 잠시 숨겨져 있었던 게 아닌가 봐요…”

병곤은 잠시 꿈꾸는 표정이 되어 말을 멈추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인데 갑작스럽게 스스로에게 빨려 들어가더라고요. 인간 존재의 의미를 두고 심각한 고민이 시작되었는데 이를 두고 대개는 사춘기를 앓느라 그렇다고 하지요. 뭐, 저는 그런 말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어째든 삶에 대한 회의로 참 많이도 방황했었어요.”

“삶의 의미에 대해 진지한 의문을 품게 되는 건 자연스럽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 이상이었던 것 같아요. 하필 그 즈음 데미안이라는 소설을 읽었는데, 제가 싱클레어가 했던 것처럼 미련퉁이 짓을 벌인 적이 많아서인지 상당히 공감을 했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나는 데미안과 같은 존재를 만나지 못했다는 상실감이 들었던 데다가 어인 일인지 자꾸 형과 나를 비교해보게 되더라고요. 그러다보니 나는 너무 초라하지 않은가 자꾸 자신에게 되묻게 되고… 괜한 열등감이 가슴 속에 꽉 차있었던 거죠. 그런 휑한…마음속에 전혜린이 파고들었어요.

 

처음에는 그녀 스타일이 너무 맘에 들었지만 갈수록 전혜린이라는 사람이 가진 출중한 능력에 대한 시기심도 일었으니~~ 어쩌면 그렇게 자신을 온갖 군데 다 가져다 붙이는지… 정말로 구제불능 그 자체였다고나 할까요?”

서린은 마치 몽상에 잠긴 듯 지난 일을 얘기하는 병곤이 오히려 그 때를 그리워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창곤에게서 병곤의 자살사건에 대해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감수성이 다른 또래의 애들보다 지나치게 예민한 병곤은 전혜린을 따라 하기로 작정했다. 열등감, 자괴감 이 모든 것을 버리고자 하는 의도였다. 전혜린처럼 수면제를 다량으로 먹고 자살을 실행에 옮겼으나 다행히 창곤에게 일찍 발견되는 바람에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그런 경험은 누구나가 할 수 없는 경험이어요. 저는 오히려 그것 자체가 지금 현재의 도련님을 만들게 도와준 자양분이 되었을 수도 있다 생각 드는데요. 다르게 표현하자면 당시의 시리도록 아팠던 마음의 상처가 더 이상 곪아 터지도록 하지 않고, 데미안 이상의 사람으로 이끌게 했었을 수도 있거든요.

좀 분위가 심각해졌는데, 여기에서 우리에게 여전히 고민을 안겨주는 비슷한 주제로 우스개 퀴즈하나 낼까요? 도련님이 고민하였던 ‘나’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게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어요. 유명한 과학자인 ‘스티븐 호킹’같은 분은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죽음 이면의 세계는 없다고 했지만… 그래도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니에요?”

“참 도련님도~~ 제가 그냥 난센스 퀴즈라고 했잖아요. 방향을 완전히 바꿔서 생각해보세요.”

이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병곤은 손을 마주치며 대답했다.

“아 그거요? 이제 보니 ‘나’라는 것은 ‘일인칭 대명사’ 네요!”

이 말에 둘은 함께 함박웃음을 터트렸다. 이처럼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서 서린은 병곤이 계속 간직하고 있었던 상처의 찌꺼기와 열등감을 녹여주었다. 그러나 두 사람만의 만남과 대화가 잦아지면서 병곤은 형수를 향한 애정이 싹트고 있음을 느끼고 기겁하였다. 서린은 병곤의 표정에서 그런 감정을 알아챘으나 모르는 채 하고 그 때문에 또 다른 상처를 받지 않도록 애를 쓸 수밖에 없었다. 병곤은 형수로 향한 애정을 깊숙이 가라앉히고 자신을 추스르고는 했다.

 

지구로 향하는 소행성

 

어둠이 내리면서 별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이내 밤하늘 전체를 수놓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모두들 관측대로 올라와 번갈아 가며 망원경을 관찰하다가 형 식구들이 침실로 내려가고 나서도 병곤은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특히 유사 이래로 지구에 가장 근접하고 있다는 혜성에 초점을 두었다. 근접이라고는 하지만 지구로부터 3천만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이었는데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가 38만 킬로미터인 것을 감안한다면 쉽게 가늠하기 조차 어려운 거리였다. 밝고 둥그렇게 빛나는 핵과 코마 뒤로 환상적인 긴 꼬리를 뽐내며 우주 공간을 질러가는 혜성의 모습은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다음 날 오후 형 식구들이 모두 떠나고 나서 그만 덩그렇게 거실에 남자 마음이 허전해져 창밖을 바라보다가 거실 안을 어슬렁거리다 하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였다. 그러다가 탁자 한 구석에 놓여있는 제법 큰 상자가 눈에 띠었다. 깔끔하게 디자인 된 포장지에 쌓여 있었는데 분명 형의 가족이 떠나기 전까지 존재하지 않던 것이었다. 의아해 하면서도 짐작이 갔다. 아니나 다를까 포장을 뜯어보니 상자위에 예쁜 메모지가 놓여 있었고 ‘저의 원군이 되어주신 도련님께 항상 고마워요. 이것은 도련님의 연구를 상징하고자 하는 것이니 맘에 들지 않더라도 받아주세요’ 라는 글귀가 적혀있었다.

 

코끝이 찡해지면서 형수의 애정 어린 마음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병곤은 바로 상자 안을 살펴보았다. 놀랍게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라는 조선시대 천문관측기구의 축소형이었다. 문헌으로만 내려오던 것을 몇 몇 과학자들이 고증을 거쳐 재현시켰고 세종대왕 능인 영릉에 전시해 놓았다는 글을 본적이 있었는데 본래는 ‘간의(簡儀)’라는 천문측정 기구를 축소하고 기능을 보완해서 만든 것이라 했다. 그것을 어루만지던 병곤은 자신에 대한 형수의 변함없는 마음이 허전함을 채워주는 것 같아 괜스런 외로움을 이내 떨쳐버렸다. 밤이 되자 다시 밤하늘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소행성대를 들러보다 혜성으로 방향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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