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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스토리

악마의 가면유희(제2화)

by 허슬똑띠 2022.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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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에 잠시 서있었던 길가의 안쪽에 차를 세우더니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거예요.”

사내는 그녀의 완강한 태도를 일거에 제압하려는 듯 순식간에 겉옷을 찢어발기고 들입다 덮쳐왔다.

흥분으로 광란의 도가니에 빠진 그가 한 순간 빈틈을 보인 사이

그녀는 남자의 팔뚝을 물고 나서 비명을 지르는 그를 두발로 힘껏 내쳤다.

차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친 그가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차에서 뛰쳐나와

죽기 살기로 도로를 따라 무작정 달렸다.

다행히 곧바로 쫓아오지는 않았다.

언덕을 넘어와 만약을 대비해 산비탈에 잠시 몸을 숨겼다가 때마침 차의 불빛이 나타나자

있는 힘껏 내달아 와서 구원을 요청한 것이다.

“참, 사내들이란 조금도 방심해서는 안 될 존재죠.

그런데 그 인간과 사귀는 사이가 아닌가요?”

‘예까지 함께 올 정도면’ 이라는 뒷말은 삼켜버렸다.

이미 뱉은 말조차 괜한 말이 아닐까 해서였다.

역시 그녀는 더 말할 기분이 아닌 듯 그대로 말문을 닫아버렸다.

찬찬히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계속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우리는 무사히 서울로 올라올 수 있었다.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려면 당장 겉옷이 필요했으므로 늦도록 영업하는 쇼핑몰로 갔다.

그녀의 치수를 대충 가늠하여 내가 마음에 드는 옷을 고르고 속옷까지 챙겼다.

옷을 갈아입고 난 그녀는 예쁘고 매력적인 본래의 자태를 거의 되찾은 듯 했다.

이런 매력이 그 놈의 눈을 일순 뒤집히게 만들지 않았을까 싶었다.

“이제 집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어디로 가면 되죠?”

이 말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면서 고개를 완강히 저었다.

“저~ 죄송하지만 이대로 집에 갈 수 없어요.”

그놈이 집 앞에서 기다릴게 분명하단다.

이해는 갔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시쳇말로 대략난감,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하는 수 없이 부근의 모텔에서 오늘 밤을 지내라고 했다.

모텔 방에 들어오자마자 그녀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거는 듯 했다.

나는 방해되지 않도록 복도에 나가서 커피를 빼 마셨다.

꽤나 시간이 걸렸는데 그녀가 문을 빠끔히 열고 들어오라고 했을 때 그 이유를 알았다.

샤워까지 하느라 그런 것이었다.

들어서자 어머니에게는 회사에서 갑자기 일박이일 연수를 하는 바람에

내일 가게 되었다고 했다는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그로 인해 묘한 감정이 출렁댔으나 짐짓 아무렇지 않은 양 그녀에게 줄 커피를 탔다.

“저는 이제 그 회사를 그만두어야 할 것 같아요.”

커피를 받아들고 침상에 걸터앉으면서 무덤덤하게 꺼내는 말은 나를 무척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그녀의 말로 미루어 짐작컨대 그 사내는 직장 상사일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어떻게 인도하여야할 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나몰라 라고 그냥 손을 빼자니 솔직히 운명처럼 다가온 그녀가 너무 아까웠다.

옷깃을 스치는 것만도 몇 겁이 지나는 동안 겨우 대할 수 있는 특별한 인연 때문이라 던데

오늘 상황은 그 몇 곱절이나 될 정도이지 않은가.

“알았습니다. 지금 많이 힘들 테니 이젠 푹 쉬어야 될 것 같네요.”

나는 십만원과 내 휴대폰이 적힌 메모지를 그녀 옆에 내려놓고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억지로 내딛으며 방을 나왔다.

내일 조심해서 집에 들어가고 시간되는 대로 이상 유무를 연락해달라는 당부의 말을 뒤로 하면서.

 

다음날 그녀가 득달같이 연락하리라는 생각은 터무니없는 오산이었다.

이를 일깨우 듯 허망하게도 계속 소식이 없자 섭섭함이 몰려들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서운함은 태산 같은 불안감과 자괴감으로 변질되었다.

혹시 그놈이 뒤를 밟아 쫓아왔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녀를 끝까지 지켜주었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별의별 상상이 사람을 미치도록 만들었다.

설마하니 그럴 리는 없을 거라 강하게 부정해보지만 당장

그녀의 그림자조차 잡을 수 없으니 이런 답답한 경우가 있나?

휴대폰에 목숨 건 듯 며칠간 뚫어지게 바라보다 실낱같은 희망조차 녹아버리자

한낱 꿈에 지나지 않은 일이었다 치부하고 잊기로 했다.

‘어찌 그리 쉽게 잊을 수 있나요?’ 라는 노랫말처럼 뇌리에는 항상 남아 있었지만.

 

그녀에게 연락이 온 것은 9월에 막 들어선 때였다.

아직도 여름의 찌끄러기가 끈질기게 더위의 끄트머리를 잡고 늘어지고 있어

여전히 후덥지근하기만 했다. 단박에 그녀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오매불망하던 그 목소리가 아니던가?

나는 이 세상 모두를 얻은 기분으로 나머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해가 서산 끝에 걸리자 만사 제쳐두고 신명이 나서

그녀와 약속한 곳으로 쏜살같이 차를 몰고 달려갔다.

암울했었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화려한 웃음이 고운 얼굴 전체를 감싸고 있는 그녀를 다시 보니

너무나 눈부셔 황홀경에 빠질 지경이었다.

교외의 고졸(古拙)한 음식점에서 그녀와의 재상봉을 자축했다.

“오랜 동안 연락 못 드려 죄송해요.”

그러면서 그 날 자신을 구해준 데 대해 새삼스레 다시 감사해 했는데

단지 이 말을 전하기 위해 나를 보자고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내내 스러지지 않는 청아하고 단아한 미소는 우리의 만남이 우연을 가장한

필연적 숙명임을 그녀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음이리라.

다만 그런 속내를 현현(顯顯)하게 내보이지 않고 있을 뿐.

그만큼 유화는 습습하고 체체한 자태 그 이상이었다.

이런 생각들이 가득 차자 마구 들뜨는 마음을 억제하기 어려웠다.

“저 경찰관 시험 본지 얼마 안 되었어요. 결과는 좀 기다려 봐야 해요.”

붕 떠있는 나를 진정시키기라도 하듯 상그러운 웃음과 함께 흘러나온 이 말에 어리둥절했지만

자신감이 흠씬 배어있는 모습이 다시 또 기분을 고조시켰다.

나와 만난 뒤로 지금까지 시험 준비하느라 연락을 하지 않은 것,

경찰을 택한 이유도 모두 이해되었다.

앞날을 대비한 준비를 위한 공백이었던 것이다.

당장은 그 정도 선에서 머무는 바람에 궁금증은 여전히 남았다.

다만 그 당시의 어두운 그림자는 완연히 사라진 것처럼 보여 모든 일이 잘 해결된 것으로 생각했다.

이름이 유화라는 것과 나이가 나보다 8살 아래인 24이란 걸 그제야 알게 되었다.

그 뒤로 우리는 자주 만나 사랑을 키워갔고 아름다운 미래를 만들어 나갈 것까지 약속했다.

보면 볼수록 유화에게서는 녹턴의 음률과도 같은 애잔함과 가슴 저리는 애틋함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새록새록 다가왔고, 갖가지 야생화가 부드러운 바람에 산들거리는

초원의 꽃바람과도 같은 향기를 은은히 풍겼다.

유화의 모든 것이 나에게는 달콤하기만 했다.

 

그녀를 만나게 해준 인물이 어떤 부류의 인간쓰레기인지 당시 알고도 남음이 있었지만

그에 대한 뚜렷한 정보는 하나도 없었다.

직장상사라는 것 외에는 다니던 회사이름이나 그의 이름은 물론 직책도 몰랐다.

우리가 다시 만난 후로 유화는 그 사건에 대한 자세한 내막을 얘기한 적도 없었고

솔직히 나도 그녀가 그런 불유쾌한 기억을 떠올리도록 하고 싶지 않았었다.

그러니 막상 그녀와 처음 만나던 당시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딱히 꼬집어 그 놈이 바로 살인자라

지목할 근거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유화가 거기를 떠난 지 7개월이 다되어 가는지라

연결고리는 더더욱 약하기만 해서 답답함만 남았다.

법 돌아가다 외돌아 가는 세상이라더니 이틀 후 나는 긴급 구속되어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경찰이 물증을 잡기 위해 내 주변을 조사하다가 어처구니없게도 내차의 문짝 틈에 은밀하게 구겨 넣은

피 뭍은 스카프와 함께 그녀의 신분증을 찾아내었다는 것이다.

다음 날 모든 미디어에서 이 사건이 발표되었고

나는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살인피의자로 확정되어 버렸다.

앞으로 회사를 포함한 나의 모든 생활은 엉망진창이 될 것은 물론이고

유화의 죽음과 함께 나의 꿈 역시 가위 일장춘몽으로 끝나 버릴 참이었다.

검찰에 송치되기 직전 친절하게도(?) 수사관이 뜻하지 않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유화의 어머니가 내가 절대로 살인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딸이 다니던 회사의 기획실장인 강준식이라는 인물을 조사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가 그 때 유화를 범하려 했던 녀석과 동일한 인물일 런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혹여나 해서 내가 유화를 만나게 된 사연에 대해 수사관에게 얘기했다.

이 말에 경찰은 강준식을 조사해보는 것 같아서 기대를 해보았지만 돌아온 것은 잿빛 절망뿐이었다.

“당신이 말한 강실장이라는 사람은 알리바이가 확실해!

또 유화씨가 그 회사직원이었던 건 사실이지만

회사를 그만둔 지 꽤 오래되었고 생사조차 모른다더라고.”

“회사 다닐 적에 그 사람이 유화씨를 못살게 굴었다고 하던데…”

“유화씨 어머니도 그렇게 얘기를 했지만, 글쎄? 딱히 그렇다고 볼만 한 건 아무것도 없네.

특별한 혐의가 없다는 거지. 허나 당신이 진범이라는 걸 가리키는 물증이나 심증은 너무 뚜렷해!

자, 그만 버티시고 순순히 인정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나는 흑단같이 검디검은 세계가 흉측스런 미소를 띠며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바로 그 앞으로 내몰린 것 같아 온몸을 떨었다.

저 입 속은 한번 떨어지면 두 번 다시 나올 수 없는,

끝도 보이지 않는 나락이 아닌가?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다행히도, 비명에 간 유화의 한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이

자꾸만 빠져나가려는 힘을 북돋아 주었다.

애면글면 머리를 쥐어짜다보니 언젠가 읽었었던 추리소설의 한 대목이 가물가물 피어올랐다.

“뭐, 내 말은 귀전에도 담으려 하지 않으시겠지만 마지막으로 제발 한 가지만 더 조사해봐 주십시오.”

“또? 이제 빠져나갈 구멍은 없는 것 같은데?”

“제 생각으로는 강준식의 알리바이가 조작되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를 어떻게 밝혀낼 수 있을 것인가 나름 생각해보았습니다.”

수사관은 무슨 엉뚱한 소릴 해대느냐며 손사래를 쳤지만 나는 굴하지 않고 얘기를 계속했다.

“전에 제가 읽었던 어떤 추리소설의 내용이 갑자기 떠올랐는데요,

거기에는 살인자가 붙잡히게 되는 특이한 연유가 있었더랬습니다.”

담당 수사관은 이 말에 다소간 흥미가 있어 보였는지 말을 제지하지 않고

오히려 얘기를 계속 해보란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는 조근조근 설명해 나갔다.

“만약 그런 사실이 전혀 없다고 한다면 저는 제가 모든 죄를 뒤집어쓰겠습니다.

더 이상 세상 살맛도 없고요. 불쌍한 유화를 만나러 가겠습니다.”

사형집행전의 최후 진술과도 같은 내 말에 수사관의 마음이 움직였던 것일까?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어기적거리면서 다른 수사관에게로 가더니 귓속말로 부탁을 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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