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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스토리

악마의 가면유희(제1화)

by 허슬똑띠 2022.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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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였다. 데이트 약속이 깨져 아쉬웠지만 마음을 다잡고 업무에 도움이 될 정보를 검색하면서 부족한 분야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와중에 틈틈이 전화를 해보았지만 연속 응답이 없자 어제 전화를 걸었을 때 다소 급박한 듯 했던 그녀의 목소리가 더욱 더 생생하게 떠올랐고 그 때마다 꺼림한 마음이 정신을 흩뜨려 놓았다.
연한 안개가 퍼지듯 어느새 사르르 덮어온 땅거미가 물들여놓는 퇴색조의 검은 공간에 불빛들이 점점이 수놓아지고 있을 때 평소와 별다르지 않은 음률의 벨소리가 적막을 깼다.
30분 전 집으로 걸려온 전화가 아무런 반응 없이 끊어졌었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갔다.
“계십니까?”
톤이 굵은 목소리는 일순간 불길한 느낌을 파도치게 했다.
아니나 다를까, 현관문을 열자 떡하니 버티고 있는 다부진 체구의 수사관들이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뻗치고 있었다. 그들은 저승사자의 증표라도 되는 듯 신분증을 내밀었다.
“유화씨라고 아시죠? 어제 밤에 살해당했습니다.”
그들을 빤히 보며 ‘요번은 아닐 걸! 정말 아닐 걸’하면서 예감이 잘못됐을 거라 스스로를 달래는 억지 위로가 무색하게도, 수사관이 툭 내던진 이 말에 나의 몸은 석고상처럼 뻣뻣하게 굳어갔다.
게다가 창졸간에 몰려든 현기증으로 그 자리에 쓰러질 뻔 했는데 수사관이 잡아주는 바람에 모면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론 그들은 이것을 아주 지능적인 쇼로 판단했었다는 거였다. 가까스로 정신을 가누고 난 뒤 나는 그들의 임의동행 요청에 기꺼이 응했다. 왜, 어떻게 그녀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지 알아야만 했다.
경찰 조사실에서 심문을 받으며 내가 가장 유력한 살인용의자로 지목받고 있음을 눈치 채고 경악했다.
아니 내가 어떻게 사랑하는 유화를 죽일 수 있단 말인가?
통분으로 인한 아우성이 침묵 속에 들끓었지만 아무 소용없는 짓이었다. 더욱이나 그녀가 더 이상 내 곁에 있을 수 없기에, 견딜 수 없는 슬픔과 가슴 에이는 고통은 갈수록 증폭되었으나
그들은 한갓 가식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러다보니 사정없이 이어지는 날 선 질문은 마음속에 깊고도 참혹한 상처를 남기며 무참히 꽂혀들어 비릿한 피 냄새를 풍기곤 했다.
이런 궁지가 나를 미망(迷妄)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 하였고 헌걸찬 수사관 앞에서 무말랭이처럼 점점 더 쪼그라들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거쿨지게 몰아치는 얘기는 논리정연하기 이를 데 없어 내가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슬픔과 고통에 단련되어갔고 비현실과도 같은 조사실의 분위기에도 친숙해지자 정신이 맑아왔다.
그러자 수사관의 짜증 섞인 말과 표정에 도리어 연민이 생겨났으며 그들에게 고분고분히 응하기로 마음을 바꿔먹게 되었다.

수사관에 따르면 유화의 시신은 서울에서 별로 멀지 않은 야산에 버려져 있었는데 오늘 오후 1시 경 등산하고 내려오던 사람들에게 발견되었으며 사망 시간은 어제 오후 11시에서 오늘 오전 2시 사이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내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것은 그녀가 사망하기 전 마지막 통화한 사람이 나였고 또한 내가 그녀의 애인이라는 점 때문이
었다. 거기다가 오늘 내가 간간이 그녀에
게 전활 해댄 것은 범인추적에 혼선을 주기위한 교활한 행동에 다름 아닌 것으로 본 것이다. 그들의 문초는 유화가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말다툼
하다 충동적으로 그녀를 살해하고 유기했
다는 시나리오에 근거한 듯 했다.

“수사관님이 확인하신 것처럼 어제 밤 10시 30분쯤 유화에게 전화를 걸었던 건 사실입니다. 오늘 만나기로 한 약속을 확인해보고자 한 거죠. 처음에는 전화를 안 받았고 두 번째에 통화가 됐어요. 말소리가 약간 다급해 보여 신경이 쓰였는데 좀 그럴 일이 있다면서 내일 약속을 미뤄야겠다고 하더라고요.
내가 뭘 잘못한 게 있어서 그런 건 아닐까 찜찜했지만 통화할 기분이 아닌데 다시 전화하기도 그렇더라고요.
그래 ‘에이 별일 아니겠지’ 하고 마음을 달래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나는 그 때 유화에게 무슨 일인지 자세하게 묻지 않았던 것이 후회가 되었고 울화가 치밀었다.
당연히 그랬어야 마땅한 게 몇 주 전부터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먹구름을 감지해
왔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 뒤 꼼짝 않고 집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는 걸 입증할 수 있나요?”
“혼자 살고 있고 한밤에 올 사람도 없는데 그걸 무슨 수로 입증한단 말입니까?”
“어째든 증명할 방법이 없다는 거 아닙니까? 그것은 당신이 그 사이에 나가서 유화씨를 죽인 후 거기다 유기하고 올 수도 있다는 얘기도 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유화를 죽일 이유도 없고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사람이 죽었는데 말도 안 된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그건 그렇고 어디서 살해했는지 나 털어놓으시지요.”
기가 막혔지만 수사관은 완전히무시했다.
그 뒤로 계속 범행 장소를 놓고 입씨름하
다가 밤샘 조사가 끝난 뒤 경찰은 일단 나를 귀가시켰다.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다보니 오늘은 그 정도 선에서 그친 것 같았다. 집에 돌아오
니 울컥 가여운 유화의 생각이 허전함과 서러움을 몰고 왔고 이내 감당할 수 없는 분개심으로 변했다.
도대체 어떤 놈일까? 무슨 연유일까? 날카로워진 심신을 추스르며 나름 추적해
보기 위해 우리의 인연이 시작된 날을 상기시켜보았다.
거기에 단서가 있을 수도 있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새봄이 만물에 한창 활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던 날
아주 묘한 상황에서였다.
그날 밤은 계절에 걸맞지 않게 사나운 빗줄기가 온천지를 노드리듯 사정없이 퍼부어대었다.
와이퍼는 미친 듯이 차의 앞 유리를 마구 헤쳐 대고 있었지만 세월의 더께가 덕지
덕지 눌러 붙어있는 퇴락한 집의 창문유리
처럼 뿌옇기만 해 도통 앞가림을 하기 어려웠다.
전조등은 있으나마나 했지만 그래도 제 기능을 다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듯 했다. 빗방울이 앞 유리창을 세차게 두드려댈 적마다 불안감과 후회가 무르익은 열매처럼 톡톡 터지며 긴장감과 뒤범벅이 되었다.
갑자기 원주로 출장을 가게 되어 볼일을 보고 돌아오다가 고속도로가 막히는 바람
에 나름 꾀를 낸다고 이 길로 들어선 게 후회막급이었다.
지척도 가늠하기 어려운데다가 차들의 왕래가 거의 없다시피 한 외진 길이어서 무섭기조차 했는데 그런 심정을 알아차리
기라도 한 건가?
갈지자를 이루면서 다소 언덕진 길을 엉금엉금 올라가고 있는데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돌연, 희미한 전조등 불빛에 허여멀건 물체가 비춰졌기 때문이었다. 산발한 머리며 소복 비슷한 옷은 전형적인 처녀귀신 바로 그 자체였다.
더더구나 그것은 가만히 서있는 게 아니라 차로 달려들고 있어 더 기겁하게 만들었
다. 차를 급정거 시키자마자 눈을 질끈 감았지만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심장이 터질 듯 몸부림쳐 댔다. 에이 이판사판
이다, 설마 나를 잡아먹기야 하겠냐고 오지게 마음먹고 슬며시 눈을 뜨며 고개를 돌렸다.
흐릿하게 보였지만 지레짐작과 달리 분명 저승사람은 아니었다. 뜻하지 않게도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온통 비에 젖어있는 머리에다 흰 속옷만 입은 모습은 여전히 겁을 삭이지 못하게 했지만 그녀의 얼굴에 짙은 공포가 서려
있는 데다 자신을 태워달라는 간절한 몸짓
을 해대고 있음을 알았다. 급히 차의 잠금
장치를 열면서 뒷좌석에 타라고 손짓했다. 그녀는 허겁지겁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기도 전에 시트에 뛰어들어 잔뜩 웅크렸다.
정말 제대로 한 짓인가 하고 후회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호기심도 발동하였다. ‘참 누가 사내 녀석 아니랄까봐, 쯧쯧!’ 나는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찼다.

“이다지 찬비를 맞았으니 몸이 아주 꽁꽁 얼어붙었겠네요. 더 큰 일 나기 전에 몸을 녹여야 될 것 같은데요?”
백미러로 그녀의 상태를 살피다가 당장 그녀의 몸을 덥혀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난방기를 세게 틀고 나서 트렁크로 가려했다. 겨우내 보온 보조용으로 썼었던 담요가 마침 떠올랐던 것이다. 그녀는 덜덜 떠는 바람에 이빨을 딱딱 마주치면서 제발 이 자리를 떠나달라는 애원으로 내 호의에 답했다.
힘겹게 내젓는 손이 너무 애처롭게 보여 우선 이 자리를 벗어난 뒤 가면서 자초지종을 물어보기로 결정했다.
차를 움직이자마자 고개 너머로 전조등이 나의 눈을 흑막으로 덮는 듯 비추어대며 급히 다가왔다. 내 차와는 비할 바 없는 고급 승용차였는데 스쳐가는 도중에 일찰나 나도 모르게 숨이 콱 막혔다.
두 차의 교차장면이 마치 슬로모션처럼 펼쳐지는 가운데 나를 힐긋 바라보던 운전자의 눈에서 예리한 광채가 빛나 보였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 지역이 기분 나쁜 장소인 것 같았다. 속도를 높여 언덕을 넘어 내려와 평탄한 길에 들어서자, 산으로 향하는 작은 길이 여유 공간을 만들고 있는 곳이 나타났다. 그곳에 차를 세우고 주저 없이 매서운 빗줄기 속으로 나섰다. 흠칫하며 차의 뒤편을 향하는 내 움직임을 지켜보는 그녀의 눈은 아마도 의심과 불안감으로 그득 차 있을 터였다.
사실 처음 보는 남자에게 온전히 믿음을 주는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더군다나 완전 무장해제 상태가 아니던가? 그녀의 불안감을 불식시켜주고 싶어 재빨리 트렁크에서 담요를 꺼내들고 와 운전석에 앉자마자 그것을 넘겨주었다.
머뭇거리던 그녀는 그것을 받으면서 들릴 듯 말듯 한 목소리로 고맙다는 답례를 하는 데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는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었던 겁니까? 난 귀신이 나타난 줄 알았잖아요?”
히터에서 나오는 따뜻한 바람으로 몸을 녹이도록 앞좌석에 그녀를 앉힌 다음 부러 농담을 섞어가며 그녀가 내막을 설명해주
기를 유도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그래요… 상당히 험한 일을 당한 것 같은데… 아직도 경황이 없을 겁니다. 한숨 주무세요. 조심해서 집까지 모셔다 드릴 테니.”
그녀는 침묵을 지키다가 고개를 끄덕이면
서 그제야 말을 꺼냈다. 아직도 냉기가 다 가시지 않은 듯 약하게 이빨을 마주쳐
가며.
“아까 전에 지나갔던 차 있었죠? 저는 그 차로 이곳에 끌려오다시피 왔어요.”
말을 꺼내자마자 눈물을 쏟았는데 그 때의 기억이 설움을 북받치게 했으리라. 히터에서 연신 흘러나오는 훈풍으로 점차 발그레 변해가는 뺨에 눈물이 타고 흘러내렸지만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울먹이며 말을 이어갔다.
방금 욕실에서 나온 것처럼 아직도 젖어있는 머리카락과 본래의 아름다운 생기를 찾아가는 얼굴이 너무도 뇌쇄적
이어서 나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까닥 삼켰다.
그러고 나서 도둑놈 제 발 저리는 것처럼 그녀가 그 소리를 들었을까봐 아차 했으나 듣지 못한 건지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는 건지 하고자 하는 말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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