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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스토리

악마의 가면유희(제3화)

by 허슬똑띠 2022.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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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이 일어난 듯 했다. 상황이 백팔십도 바뀐 것이다. 혹시나 하는 희망으로 던진 말이 진실을 밝혀내는 데 일등공신이 될 줄이야. 강준식이 긴급체포 되고나서 풀려난 나는 경찰이 밝혀낸 강준식 알리바이 조작사건의 전말을 듣게 되었다.

유화가 사랑의 꿈, 밝게 빛나는 앞날에 대한 희망으로 긴장을 풀었던 게 잘못이었다. 일이 터지기 한달 전 자신이 다녔던 회사에서 친하게 지냈던 언니에게 안부전화를 한 게 화근이 된 것이다. 그녀가 유화의 새로운 연락처를 알고 나서 강준식에게 일러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유화가 없자 그녀가 대타가 되는 바람에 복수심이 발동해서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유화와 만나기로 해놓고 대신 강준식을 보내기조차 했다. 그때부터 그로부터의 시달림이 다시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연유로 그녀의 얼굴에 근심이 어리게 된 것이다.

그날 그녀가 어머니의 심부름을 갔다가 집 근처 전철역에 도착했을 때는 밤 10시 반이 거지반 되고 있었다. 전철역에서부터 걸어 집 부근의 공원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가로등 밑에 서있는 사람을 보고 섬뜩해서 제자리에 섰다. 바로 그때 좋은 않은 낌새를 예견한 듯 휴대폰이 울렸다. 유화는 전화보다도 당장 구원의 손길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쌩쌩 달리는 차량들뿐이었다. 다급한 마음으로 집과는 반대 방향으로 뛰어갔다. 다시 또 전화벨이 울렸다. 대강 사유를 둘러대면서 내일 만나기로 한 약속을 연기하자는 말만 하고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끝내자마자 곧바로 쫓아온 사내에게 잡히고 말았는데 그는 다름 아닌 강준식이었다.

“후후, 그 자식이 너를 도와주러 온다던?”

빈정거리는 그에게 그녀는 사정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제발 나를 이대로 내버려 둬요! 이렇게 애원할 게요”

 

“그래? 그러면 조용히 대화를 나눠 볼까?”

두 손을 모아 싹싹 비는 그녀를 바라보던 그는 갑자기 나긋한 목소리로 달래듯 말하더니 슬그머니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공원 안쪽으로 밀다시피 들어갔다.

“네가 뭘 모르는 것 같은데, 네 꼴로 그 녀석과 결혼할 수 있을 것 같아? 언감생심! 내말 한 마디면 그냥저냥 작살날 걸?”

“당신은 그이를 거론할 자격도 없어요!”

“이거 왜 이러시나? 너는 영원히 내거야. 그러니 딴 생각 하지 말라고.”

아무리 사정해보았자 쇠귀에 경 읽기 식이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악마의 성질이 어디 가지 않았음을 절감한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달아나려했으나 별무소용이었다. 애초 그를 따라오지 말았어야 했다. 그는 잽싸게 그녀의 팔을 잡아채어 와락 품에 끌어안았다.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유화가 워낙 거칠게 반항하자 한참을 실랑이 하다가 엉겁결에 내치고 말았다. 유화는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수풀 속으로 튕겨져 나가 가지를 베어내어 날카롭게 남아있던 나무 그루터기에 목덜미를 찔리고 말았다. 피를 흘리며 꼼짝하지 않고 있는 유화를 살펴보던 그는 그녀가 곧 죽을 것으로 판단하여 당혹감으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녀를 일으켜 세워 옆구리에 끼고 끌다시피 어둑한 공원 옆 도로에 세워놓은 그의 차로 갔다. 트렁크에 그녀를 실은 다음 잠시 방안을 생각한 그는 급하게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판단미스였다. 치명상이기는 했지만 그 당시 빨리 응급구조만 했더라도 유화가 소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집에 도착한 시간은 11시 반경쯤이었는데 기다리고 있던 아내의 마중을 맞았고 태연스럽게 잠자리에 들었다. 그 사이 유화는 차가운 트렁크 속에서 서서히 죽음에 이르렀다. 그는 아내가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하자 2시 쯤 슬며시 빠져나와 차를 몰고 서울 근교의 야산으로 갔다. 먼저 유화의 피에 물든 스카프와 신분증을 챙긴 다음 시신을 숲속에 내려놓고 낙엽과 나뭇가지 등으로 대강 덮었다. 일을 끝낸 강준식은 심호흡을 하고 난 다음 급하게 집으로 향했다. 휴대폰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유화의 시신을 메고 가던 중 빠져나가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신경이 곤두서있는데다 마음이 조급하다보니 조금이라도 빨리 돌아가기 위해 지름길로 간다고 새로 난 지 얼마 안 된 도로를 택했는데 이것이 그에게는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의 내비게이션에 그 도로의 과속단속카메라가 잡히지 않은 것이다. 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도 다행히 아내는 여전하게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그 뒤로 나의 집 주위를 서성이다가 내가 경찰서로 조사받으러 간 틈에 나의 차에다가 스카프와 신분증을 박아놓았다. 나에게 혐의가 가도록 만들기 위한 나름대로의 어설프기 짝이 없는 계략이었다. 이와 같은 조작이 들통 나게 된 것은, 새벽 3시 경쯤 서울로 향하는 그 도로의 무인단속카메라에 강준식 차가 과속하며 지나치는 것이 걸렸을 뿐만 아니라 그의 차 트렁크에서 유화의 것으로 확인된 핏자국이 발견된 때문이다.

 

강준식이 체포되자 혐의를 벗게 되어 집에 돌아오니 유화의 편지가 와있었다. 일이 터지기 얼마 전에 보낸 것이리라. 급히 편지를 뜯어보았다.

‘사랑하는 경민 오빠! 오빠를 만난 게 저에게는 너무도 행운이었어요. 오빠에게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새로운 희망에 들떠 보낸 날이 너무도 아름다운 환상인 것 같아요. 그 환상에 빠져있다 보니 오빠와 영원히 함께 한다는 게 저에게는 정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어요. 저는 오빠에게 그럴 만한 자격을 상실한 인간인데도 그렇게 해서 오빠에게 크나큰 상처만 남긴다면 제가 너무도 파렴치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이제 진실을 전해드릴 때가 된 것 같아요.’

이렇게 시작된 그녀의 글이 처음에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그녀에게 그다지도 미쁘게 보이지 않았었던 걸까? 한탄 속에 계속 읽어 내려갔는데 기막힌 사연이 펼쳐지자 비분강개와 증오감이 거칠게 뒤범벅되어 노도처럼 몰려들면서 치가 떨려왔다. 가면 속 악마의 유희에 농락당하다가 가버린 그녀가 한없이 가여웠고 강준식에 대한 적개심이 그녀의 장례식을 치룬 이후에도 오랫동안 삭을 줄 몰랐다.

 

유화를 괴롭혀 왔던 강준식은 그녀가 다녔던 회사의 기획실장이며 이사였다. 그의 아버지가 바로 회사의 사주여서 비록 30대 중반이었지만 그런 지위를 꿰차고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장은 자신의 형이 사망하는 바람에 회사를 물려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강준식은 그녀가 기획실에 근무하면서부터 그녀의 외모에 반해 치근대기 시작했다. 이미 결혼하여 애가 딸려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그녀를 유혹하다가 끝내는 그녀를 겁탈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처음 그녀를 만난 날도 그에게 다시 성폭행을 당할 뻔 했었던 것이다. 그에게 시달리면서 회사를 계속 다니느냐 마느냐 고민하다가 나와 조우하게 된 그 날 이후 내게 말한 대로 결국 회사를 그만 두었다. 사유를 꼬치꼬치 캐묻는 어머니에게 사실을 그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얘야, 나는 너무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구나. 이러한 사실을 언론에 하소연이라도 해야겠다. 그런 못된 놈은 이 사회에서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돼!”

어머니의 눈에서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노여움의 불꽃을 보았으나 그녀는 대꾸할 수가 없었다. 언론에 공개되면 자신의 앞날에 어떤 먹구름이 닥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한편으론 자신의 잘못된 처신이 이러한 일을 초래한 것 같기도 해서였다. 어머니는 딸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자 이내 생각을 바꾼 듯했다.

“그래 그건 아무래도 네게 별로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구나. 그래도 이대로 물러서기는 너무 억울해! 내가 회사의 높은 사람을 만나 앞으로는 더 이상 이런 일이 없도록 보장하고 네가 안심하고 회사에 다닐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해야겠다.”

유화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어머니는 다음날 회사로 찾아갔었으나 침울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 뒤 어머니가 허둥대는 모습을 보고 당시 유화는 의아해 하기는 했으나 자신이 회사를 그만 두더라도 강준식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게 확실하다고 판단해서 그러한 것일 거라고만 느꼈다. 어머니는 무언가에 쫓기듯 서둘러 이사를 했다. 그런 다음 집에서 조용히 경찰공무원 공부를 하도록 했다. 경찰이 되면 안심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녀는 어머니의 말을 듣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웬만큼 생활이 안정된 후 비로소 나에게 연락을 해왔고 그녀와의 밀월이 시작된 것이다.

 

유화의 장례를 치르면서 어머니는 차마 딸에게 다 하지 못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녀가 유화의 말을 듣고 회사를 찾아갔을 때 망연자실하여 하마터면 졸도할 뻔했다. 이게 대체 무슨 해괴한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그 회사는 대기업으로 성장했고 회사명도 바뀌었지만 예전에 그녀가 잠시 몸담고 있었던 회사였으며 강준식은 다름 아닌 유화의 배다른 오빠였던 것이다. 그녀가 돌아와서 딸에게 진상을 말해 해주었더라면 아마도 지금의 불행을 비켜갈 수 있었을 런지도 모른다. 왜 그러지 않았을까 라는 회한은 그녀를 대성통곡하게 만들었다. 나는 모녀의 모질고도 기구한 운명이 너무 어처구니없고 가련해서 목이 메었다. 주체할 수 없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의 불길을 꾹꾹 억눌러 가며 어머니를 위로했다.

유화 어머니 유경은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남부럽지 않게 자랐으나 사채업자에게 말려드는 바람에 잘나가던 아버지 사업이 망가졌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었다. 그녀가 대학 1년 때였다. 학교를 그만두게 된 그녀는 살림을 부양하기 위해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만 했으나 힘든 일 모르고 고이자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별로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몰라도 아버지 친구가 경영하는 가구회사의 서울 지사에 사무경리로 취직하게 되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잘 돌봐주어 나름 힘들지 않게 보냈는데 일이 터진 건 1년이 다 되어 갈 무렵이었다.

그날은 서울 사무실 전체 회식이 있던 날이었다. 성남의 현지 공장에서 자주 서울 사무소에 들락거리던, 사장 동생인 상무의 참석이 당초에는 예정되어 있지 않았는데 회식자리가 무르익어갈 무렵 갑자기 그가 나타났다. 사무실 사람들은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출현에 다소 당황했다. 다만 그가 회식비를 낸다고 하는 바람에 받아줄 수밖에 없었다. 회식이 끝나고 모두 헤어질 무렵 그는 사무실에 가지러 갈 게 있으니 문을 열어달라며 그녀를 붙잡았다. 그녀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함께 갔다가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그에게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다. 오래 전부터 서구적인 용모에다 매력적인 몸매를 지닌 그녀에게 음흉한 눈독을 들여왔다는 것을 아무런 눈치 채지 못했던 게 죄라면 죄일 수도 있었다. 다음날 도저히 사무실을 나갈 용기가 나지 않았으나 사무실 사람들의 성화로 계속 출근했고 사장의 동생이 나타나면 자리를 피했다. 그런 식으로 몇 달을 버티기는 했지만 서서히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자 결국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남자를 원망했으나 잉태한 생명은 너무도 소중했으므로 만삭이 되어 홀로 아기를 낳았는데 바로 유화였다.

 

장지에서 유화 어머니는 딸을 보내지 않으려는 듯 관을 부둥켜안고 놓질 않았다. 나는 절로 주룩 주룩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뿌옇게만 보이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관위로 흙이 마구 쏟아져 내리자 다시 눈물이 강물처럼 흘렀다. 정말 수억 겁을 지나도 만나기 어려운 내 사랑 유화였는데 그토록 짧은 시간동안만 곁에 있다가 가는 것이 애가 타도록 서럽고 마냥 그리웠다. 환생이란 것을 믿어왔던 건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게 간절하고 절실했다. 제발 다음 생애에는 아무런 시련 없이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애절한 소원을 그녀와 함께 묻었다.

그녀의 어머니를 부축하며 걸어내려 오는데 작은 산새 한 마리가 메마른 풀숲 속에서 푸득 튀어나왔다. 흡사 그녀의 묘지에서 나온 것처럼. 새는 묘소 인근 둘레를 잠시 돌다가 코발트 빛 창공으로 날아올라갔다.

“어머니, 유화가 모든 걸 잊고 자유롭게 천국으로 날아가네요!”

어머니는 그새가 멀리 날아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며 잘 가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진정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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